두 번째 날
2.
언제나 저는 물길 속에 서있었고, 앞뒤로 수많은 물살들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모두 제 각각이던, 각자 생김새대로 흘러가던 물결들에 많이 어지러웠었습니다. 어느 것이 중요한 물결인지, 어떤 물결을 남겨두어야 하는지, 어떤 물결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나에게 어울리는 삶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시간들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물결은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흘러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그 물결 사이에 서있는 나의 두 다리뿐이었습니다.
가끔은 운 좋게 튼튼한 막대기나 큰 바위가 물결과 함께 떠 내려와 잠시 몸을 기대어 의지하지만 그때 일뿐. 영원히 남는 것은 나 자신뿐이며, 나 외의 모든 것을 결국은 보내야 함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떠나보냅니다. 시간을 떠나보내고,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제의 나를 떠나보냅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모든 것들은 떠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이렇게 갈 때가 될 때 잘 떠나보낼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떠나는 이를 따라 함께 떠나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먼저 담담해야 합니다. 어릴 때는 무엇이든 고저(高低)가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야 담담함의 소중함을 조금씩 알아갑니다. 높고 낮음이 마치 생명력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더라면 지금은 바깥상황에 흔들리지 않은 굳건함이 마음에 듭니다. 바깥 눈들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오르락내리락 널뛰기를 하는 것이 그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라 할 수는 있지만, 어떤 압박에도 찌그러지지 않은 초연함의 무게에 비하면 금방 흩날려갈 것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떠나겠지요. 언제나 더 나은 곳을 향해 가지는 못하더라도, 떠난 자리에 아쉬움만은 없길 바랍니다. 떠난 자리에 남은 아쉬움은 그 자리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 발걸음에 달라붙어 저의 앞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쉬움은 후회가 되고, 후회는 두려움으로 바뀌어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떠나기 위한 삶이니, 아쉬움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생각들로 얼룩진 그 긴긴밤을 보내며 길고 긴 편지를 썼습니다. 하늘엔 까만 점이 가득 차 있고 누군가의 눈썹이 달처럼 밝게 떠있습니다. 숯 검댕이 같은 하늘에 폭 박혀 오롯이 빛을 내는 그 눈썹이 참 곱습니다. 하나뿐이지만 둘보다 진한 눈썹이, 잠들어있는 다른 이들의 눈썹을 비춥니다. 하늘을 채웠던 까만 점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하얀 종이 위를 채웁니다. 하얀 종이 위 까만 글자가 수놓아질수록 까맣던 하늘도 하얗게 밝아옵니다. 하얀 하늘은 이윽고 잠시 투명해졌다 다시 붉게 물듭니다. 마치 수행자의 삶을 하늘에 아로새긴 듯 하늘은 투명해집니다.
그 풍경이 마치 마음과 몸이 한 뜻과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초연할 수 있는 경지 그 어딘가를 향해가는 수행자 같습니다. 저마다의 색을 찾기 치열한 세상 속에서 그 투명색이 바로 무아(無亞)의 경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색을 품을 수 있으며, 어느 색에나 물들 수 있는 물과 같은 투명한 색깔. 어지러운 색감들 속에 차마 투명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되돌아봅니다. 나만의 색깔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이곳의 투명함에 위로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