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날
3.
물질적으로 글을 쓸 준비가 모두 끝나면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책상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펼쳐두고, 커피를 한 잔 내려놓았는데도 정작 머릿속은 텅 빈 방처럼 고요했다.
그렇게 '글'은 정작 내가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 불쑥불쑥 찾아와 나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잡지 않으면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위한 물질적 준비가 아닌 빗장을 걸지 않은 마음이라고.
마음이 열려있으면 어지러운 하루 속에서도 문장은 스스로 길을 찾아왔다.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글을 쓸 때면 여지없이 묻어 나왔다. 외면했던 감정도,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장면도 문장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글을 쓸 때면, 마음 어딘가에 쌓여 있던 것들이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적힌 말들은 하얀 화면에 박혀, 그대로 영원히 화석이 될 것만 같았다. 혹시 지금의 나를 지나치게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닐지, 훗날의 내가 이 문장을 낯설어하지는 않을지 두려워지기도 했지만 그런 두려움은 나에게 사치이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글이 필요했다. 문장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 있었고, 다 이해한 사람처럼 굴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속에 뒤엉켜 있던 감정들이 하나씩 풀려나가며 제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글은 나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견디게 하는 방식이었다. 상처를 지우지는 못했지만, 상처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글이 필요했다.
내가 나를 치유하는 시간, 빗장을 풀어둔 마음 하나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언제나 글이 알아서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