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에게 잘해 줄 걸 그랬어

다원화 사회를 향한 반성

by 가나다 이군


그렇게 생긴 사람들


그가 무하마드였는지, 아니면 핫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다만 가구 공장이 몰려있는 공단 방향으로 가는 버스나 전철에서 종종 그렇게 생긴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렇게 생긴 몇몇의 사람들을 접하게 될 때마다 몸이 닿지 않게 다리를 오그리거나 특유의 향신료에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렇게 생긴 사람들에게 특별히 불만이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나에게 해코지를 했다거나 나의 일자리를 빼앗았다거나 하는 그런 피해의식도 있을 리 없었다. 그 사람들이 우리가 기피하는 3D 업종의 노동력을 대신해 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고맙지도 대견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네들이 살아가기 위한 생존방안으로써의 선택이 이 땅의 필요와 맞아떨어진 것일 뿐, 거기엔 어떠한 연민도 사회적 배려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이방인 - 나와는 상관없는 -이었을 뿐이다.



적어도 한때는 노동자의 작업 환경이나 근로 조건 등 노동 환경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보도되는 그들의 생존 환경에 대해서도 도외시했다. 알게 모르게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던 나의 세계관은 캐나다에 와서 살면서 꽤나 달라졌다. 일단 그렇게 생긴 사람들 뿐만 아니라, 듣도 보도 못했던 전 세계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고, 그들과 뒤섞여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고, 그들에게 임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디로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지위를 누리는 생활이었다. 태생적으로 한국인이라는, 그곳에 살면서는 알 수 없었던 그런 엄청난 사회적 지위가 나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태생적으로 주어진 지위와 신분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국 땅에서 살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강력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때로는 난민 보다도 못하다며 자조적인 농담이 오고 가기도 하는, 이젠 내가 바로 그렇게 생긴 사람이 되었다.



베트남 신부, 난민, 그리고 다문화 가족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한국도 제법 국제화 또는 글로벌리제이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가구공장의 네팔인, 비닐하우스 농장의 방글라데시 인부, 이웃집 총각이 맞이한 베트남 신부, 아들 학교 친구의 필리핀 엄마를 위시한 다문화 가정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국내에는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10 건의 결혼 중 1건은 국제결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인식은 아직도 대원군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싶을 때가 있다. 최근엔 제주도에 머무르는 난민에 대한 이슈가 있었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화두가 되고 있는 난민 문제에 한국도 자유롭지 않게 된 모양이다.



물론 다문화 가정과 난민의 경우를 동일선상에 놓고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이들의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는 독보적인 사회 중에 하나인 한국 사회에서, 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오해일까?


또 한 가지, 비록 나쁜 의미로 쓰이지는 안 더라도 다문화 가정이란 용어 자체가 편견과 차별의 시작점이다. 문화란 원래 다양한 것이거늘. 난 다문화 가정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진정한 다문화 정책이라고 여기는 사람 중에 하나다. (사실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더 지저분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베트남 엄마가 있는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 불리지만, 영국인 아빠가 있는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 취급받지 않는다는데 있다. 왜 그럴까?)


아들에게 경고 먹는 아빠


그렇다면 오지랖 넓은 캐나다 사람들은 어떨까? 그전에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그다지 평등주의나 비차별 주의자로서의 소양을 갖추지 못한 축에 드는 인물이다. 그래서 캐나다에서 철저하게 차별 방지 교육을 받는 초등학생 아들에게 종종 옐로카드를 받는다. 특히 운전 중에 짜증이 나면 인종이나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거칠게 말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아들에게 혼구멍이 난다.


캐나다 교육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차별에 대한 경계이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이 하나로 융합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캐나다는 그 기초를 학교에서부터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하지만 사실 교육을 떠나서 아이들이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다양한 인종을 만나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날 때부터 다름을 인지하고 살아간다고 봐야 할 듯하다. 교육은 그저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하모니를 이루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는 가정통신문에 동봉된 안내장이다. 진정한 다문화의 실재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유유상종은 인지상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이다 보니 난민이나 이민자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은 존재한다. 수많은 이민자를 상대해야 하는 캐나다는 이민자 포용 정책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나라이긴 하지만 전 국민이 이민자나 난민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캐나다 사람들도 절반 이상이 이민자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인구 문제에서 파생되는 부족한 노동력 문제 등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이민 정책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이민자를 줄여야 한다는 반대 입장이 내재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특이할 만한 점은 이민자로 인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캐나다가 바뀌고 있다는 질문에 48% 대 25%로 부정적 인식이 강했으며, 캐나다에 이민자가 너무 많다는 질문에 44%가 그렇다고 대답해 아니다는 24%에 비해 두 배 가까웠다. 너무 이민자를 환대한다는 질문에도 54% 대 20%로 나타났다. 결국 이민자의 천국, 마냥 사람 좋을 것 같은 캐나다 사람들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민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https://www.ipsos.com/en-ca/news-polls/canadians-nervous-about-impact-of-immigration-on-canada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보통 저학력 저소득의 보수적 정당 지지자 층에서 보여지는 현상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캐나다 현지에서 이와 유사한 분위기를 느낀 적이 있긴 하다. 다 함께 잘 사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캐나다는 세금을 많이 걷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지금까지 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이민자들이 그 혜택을 무상으로 누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끼리끼리 모인다는 뜻의 범위가 확실히 확장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넓은 의미에서라도 끼리끼리 모이는 건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비슷한 사람들끼리가 편하고 쉬우니까 그럴 수밖에. 그러니 그 인심 좋고 차별이 제일 없다는 캐나다에서도 유유상종은 존재한다. 아니 어쩌면 캐나다에서는 워낙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있다 보니 더더욱 끼리끼리라는 강한 연대 고리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처럼 그렇게 획일적이고 단호한 천편일률적인 끼리끼리는 아니다. 수많은 다양성 내에서의 유유상종이며,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같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유유상종이다.


역지사지, 인생이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시선은 바로 '역지사지'의 관점이다. 역지사지는 바로 나와 다른 다양성에 대한 공감 능력에서 발현된다. 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험에 빠트리거나 갈등을 일으킨다. 세월호 같은 전대미문의 사고를 접하고도 남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그런 유사한 일을 겪게 되지 말란 법이 없을 텐데, 완전히 남 얘기하는 사람들 말이다. 자기 자식 죽어서 사회를 탓하는 사람들, 남의 자식 억울하게 죽어 뉴스에 나올 때 과연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말을 했을까.


그러니 문제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입장이 바뀌어보면 된다. 난민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문제의 출발은 신분의 문제로 인한 불편함 혹은 두려움, 불안감을 가져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에서 신분이나 지위로 인한 차별 혹은 불편부당함 혹은 불이익을 경험하고, 나아가 그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아 지속적인 거주가 거부되거나 혹은 추방되는 공포와 불안은 인생을 건 개인 혹은 가족의 생존을 위한 판돈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천적 지위로 인한 공감의 부재를 어찌할 수 없다면, 한편으로는 재일교포에게 가하는 일본의 태도에 대해 비난하는 우리는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다른 태도를 보였나 생각해 보면 될 일이다. 우리가 받는 차별은 억울한 것이고, 우리가 남에게 행하는 차별은 정당한 것이라는 이러한 사례는 많다.


그런데 인생이란 것이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개인의 미래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그 변화하는 물결 속에서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신분의 변화 또한 언제든지 변화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에 대한 대비는 다름 아닌 나와 다름에 대한 공감에서 출발하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다.



이미지출처 : 원불교신문


다양성의 사회 -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지금도 종종 이곳의 현지인들이 내가 한국에서 그렇게 생긴 사람들에게 대했듯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다. 하지만 만약에 캐나다에 나와 같은 사람들만 산다면 우리 가족은 벌써 깨나다를 떠나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는 본연의 인간다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종교나 정치적 이데올로기, 경제적 혹은 사회적 편견 없이 모두가 본래의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 어쩌면 그런 사회가 유토피아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 사회는 그 어떤 나라 보다도 선진 사회이며, 이에 대한 여러 경험과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반면에 몇 가지 단점 또한 지니고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다양성의 부재, 아니 다양성의 몰인정이다. 캐나다란 나라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도 아니고,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국가도 아니며, 한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도 아니다. 하지만 캐나다가 선진국임을 부인할 수 없는 근거는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의식의 선진성에 있다.


난 지금도 반성하고 있다. '그때 무함마드에게 잘해 줄 걸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