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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Jun 04. 2023

서소문 일기(西小門 日記)

서소문 일기(西小門 日記)   


이르다면 이른 아침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통근버스는 서소문을 지난다   

성벽 어딘가에 조그마한 문門이 있어   

백성百姓의 시신屍身이 나들었다는 부근 어귀   

미명未明에 지친 어깨들이 쏟아진다   

시청역 한 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시선視線을 비껴가면   

선혜청 창고 터엔 배추 써는 인부人夫들의 입김으로 후끈하고   

귀퉁이 라면집은 벌써부터 대목이다   


저만치 삼각산 품에 깃든 청와대와  

수백년 왕조王朝의 안채가 보이고  

길 건너 이오니아식 궁궐과 아관파천의 공사관   

그 앞 언제나 우리의 군경軍警이 지켜주는  

문단속 든든한 미국 대사관저가 있다   

발아래 점점이 붐비는 사람들, 침묵으로  

생계生計를 호소하는 시위자도 한 점일 뿐   

고층 통유리엔 바람 한 결 들지 않는다. 정오正午의 낯선 여유다   


반半이 접힌 하루, 소금이 녹아 내를 이루었다는  

서소문 밖 하천가 구내식당은 일과日課처럼  

허기에 찬 인간들을 제 아구에 넣고 있다  

목멱산을 등지고 팔다리 잃은 숭례문이 땅 속 굉음에 시달리며  

무너지고 있다. 서울역은 멀리 고향을 바라보고 있다.  


성문 밖 가난한 자의 땅, 피묻은 약현성당  

그런데 기억은 첫 여인女人의 성소聖所일 뿐  

서른여섯, 처진 어깨 한 번 세워 보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이르다면 이른 퇴근   

동아일보를 지난 노선버스는 어김없이

죽어 돌아갈 수 없는 백성百姓들의 길로 빠져 나간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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