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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Aug 23. 2019

꼬리 이야기

설 전날, 만두 빚는 가족 이야기

    설날이 되면 승원이와 누나는 할머니 댁에 갑니다. 설날에는 중국에 계신 작은아버지와 사촌 동생 준원이까지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거든요. 할머니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고모와 함께 살고 계셔요. 


    조그만 마당이 딸린 할머니 댁은 여름엔 시원한 마루에 앉아 수박과 참외도 먹고, 밤에는 모기향 피워 놓고 보름달도 볼 수 있지만, 승원이는 마루에 엎드려 댓돌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듣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파트와 달리 설날이 있는 겨울엔 좀 추운 게 흠이에요. 틈마다 문풍지를 발라 놓았지만, 겨울바람엔 통하지 않나 봐요. 


    겨울바람이 아무리 매서워도 설 전날에는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만두를 빚습니다. 황해도에서 피난 오신 할아버지께서 '할애비 어릴 적에 설날이 되면 꼭 만두를 빚어 먹었더랬다.'며 설날에는 온 가족이 만두를 빚어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지난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밀가루 반죽은 힘이 좋은 작은아버지 몫이 되었어요. 작은아버지께서 밀가루 반죽을 길게 늘린 다음, 동전처럼 동강동강 잘라내면, 아버지는 밀대에 밀가루를 잔뜩 묻혀 동그랗게 펼쳐 놓아요. 그러면 작은어머니와 고모는 속을 넣고 모서리를 초승달 모양으로 붙여 가며 예쁜 만두를 만들지요. 할아버지께서 계실 때와 똑같이 말이에요. 


    승원이와 누나도 만두 빚기에 끼어들었답니다. 누나는 가지가지 꽃 모양으로 만두를 만들고, 승원이는 가장 좋아하는 자동차 모양으로 만두를 만듭니다. 사촌 동생 준원이는 중국에서 타고 온 비행기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째서 비행기 모양이라는지 알 수는 없어요.


    "먹는 음식 가지고 장난하는 거 아니다."


    한쪽에서 호박전을 부치던 어머니께서 나무라시지만 


    "냅두라. 재들이야 그 맛에 하는 건데."


    할머니께서 편들어 주셨어요. 그러자 작은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만든 만두는 자기가 먹어야 한다. 못생긴 만두 먹으면 그만큼 못생겨지거든."


    하지만 아이들은 더욱 좋아라 하며 자기 만두는 자기가 먹겠다고 신이 났어요. 가만히 지켜보시던 할머니께서 고모를 향해 말씀하셨어요.


    "야들 건 따로 담아야겠다. 고모는 부엌에 가서 소쿠리 좀 가져오너라."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나간 고모를 바라보며 할머니께서 또 한 번 말씀하십니다.


    "누가 뱀띠 아니랄까 봐 꼬리도 기네. 황소바람 들어 오겠다. 문 좀 닫거라"


    자동차 만두에 바퀴를 붙이려 애쓰던 승원이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어요. 그러고는 고모께서 소쿠리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기웃기웃 고모를 훔쳐봤어요. 그때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승원이는 만두 빚으면서 무얼 그리 기웃거리노? 고모 엉덩이에 뭐 묻었나?"


    궁금하던 차에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왔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고모 꼬리를 못 찾겠어요, 할머니."


    무슨 소린가 눈을 크게 뜨고 서로 쳐다보던 가족이 한순간 '와하'하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승원이가 할머니께서 꼬리가 길다고 하신 말씀 때문에 궁금했구나? 그건 말이다……."


    작은어머니께서 무엇인가 일러주시려는데, 할머니께서는 찡긋찡긋 눈짓으로 작은어머니를 말리시며 


    "승원이 눈엔 고모 꼬리가 안 보이나? 지원이 너도 안 뵈나?"


    "예."

 

    "저도 안 보여요. 할머니."


    "저도 요."


    사촌 동생 준원이도 오른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어요.  


    "원래 사람 꼬리는 맘씨 고약하고 어른 말씀 안 듣는 사람한테는 안 뵈는 법이다. 승원이 니 어메 말 잘 안 듣제? "


    그러자 고모께서도 


    "이런! 깜박했네. 부엌에 꼬리를 두고 왔나 봐."


    하며 일어서는 척했어요.


    "에이, 사람이 꼬리가 어딨어요?"


    초등학교 이 학년인 누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비죽거렸어요. 그러자 할머니께서 물었어요.


    "지원이 니는 학교에서 열두 띠 동물에 대해 안 배웠나?"


    "그건 알아요."


    "그라믄 알겄네. 지원이 넌 말띠고 니 아배는 잔내비 띠 아이가?"


    "잔……. 나비요?"


    "원숭이띠란다. 옛날에는 원숭이를 잔나비라고 불렀거든."


    고모께서 친절하게 일러주셨어요. 그러자 승원이가 나섰어요.


    "그럼 할머니는 무슨 꼬린데요?"


    "내는 '어흥' 하고 나쁜 사람 잡아먹는 무서운 범이지. 그러니 세상에 꼬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간?"


    그러자 장난기 많은 작은아버지께서는 승원이 엉덩이를 들어 보이며


    "개구쟁이 승원인 엉치에 붙은 꼬불꼬불 돼지 꼬리가 안 보이지?"


    승원이는 정말인가 싶어 엉덩이를 보려고 앉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준원이는 그러는 승원이의 꼬리가 보일세라 쫓아 맴돌았어요.


    "꼬리가 안 보이면 엄마 말씀 잘 듣고 착한 일을 많이 하라. 그라면 보일 테니께."


    마지막 남은 만두 속을 채워 넣으며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만두가 가득 들어찬 소쿠리를 집어 들며 고모가 말씀하셨어요.


    "엄마도 참. 애들이 정말인 줄 알겠어요. 얘들아 그건 고모가 문을 열어 놓고 나가서 마치 꼬리가 걸려 문이 안 닫힌 것처럼 말씀하시는 거란다."


    한동안 잠잠하던 준원이가 조금은 실망한 듯이 물었어요.


    "사람은 왜 꼬리가 없어요? 있다면 멋있을 텐데."


    이번에도 고모께서 친절하게 설명을 곁들여 주셨어요. 


    "동물은 걸을 때 중심을 잡아 주기 위해 꼬리가 필요하지만, 서서 걷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사라졌단다."


    그때 묵묵히 뒷정리하시던 아버지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 들어 봤지? 사람이 남기는 흔적을 꼬리라고 그러기도 하는 거란다."


    "그건 나쁜 짓 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잖아요."


    누나는 '그 정도쯤은 알아요.'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어요.


    "그래, 하지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착한 일을 하는 사람도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지 않겠니? 우리 온 가족이 이렇게 모여 앉아 만두도 빚고 연을 날리는 것도 할아버지가 남기신 흔적이라고 할 수 있지."


    그때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승원이가 할머니께 여쭤봅니다. 


    "우리 엄마는 토끼띠니까 꼬리가 제일 작은 거네요?"


    그러자 할머니께서  


    "토끼가 꼬리가? 꽁지지."


    하셔서 온 가족이 '와하하' 다시 한 번 웃었어요.


    설 전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이 있어요. 승원이는 그 말이 무서웠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그만 잠이 들고 말았어요. 낮의 일 때문이었을까요. 승원이는 꿈속에서 저마다 자기만의 꼬리를 달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보았어요.


    책에서 읽은 이순신 장군도 계셨는데, 손에 쥔 큰 칼 옆으로 호랑이 꼬리가 보였고, 슈바이처 박사의 가운 밖으로는 소꼬리가 삐쳐 나와 있었어요.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애쓰신 분들이었어요. 

승원이도 꿈속에서는 말갈기 같은 꼬리를 휘날리며 멋지게 달리는 장군이 되었어요. 말달리는 승원이 옆에서 이순신 장군께서 말씀하셨어요.


    '꼬리를 보아하니, 고놈 참 훌륭하게 되겠는걸.' 


    이튿날 아침, 꿈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승원이는 왠지 기분이 좋았어요. 떡국에 자기가 빚은 만두를 넣어 먹으면서, 누나의 책가방이 부러웠던 승원이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여덟 살이 되었거든요.


    이제 승원이는 봄 여름 가을도 좋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으며 웃을 수 있는 겨울이 제일 좋아졌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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