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개학입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여름방학을 지낸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등을 맞대고 훌쩍 자란 키를 다투는 아이들, 까무잡잡해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바탕 웃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한 친구가 가족과 함께 다녀온 에펠탑과 개선문 자랑으로 침이 마르자, 다른 친구는 제주도 쇠소깍에서 탄 배가 더 재밌다며 목소리를 키웁니다.
'탁, 탁'
교탁을 두드리며 시끌벅적한 교실을 조용히 시킨 선생님께서 지원이를 부르십니다.
"잠시 연구실에 다녀올 동안 반장이 방학 숙제 좀 걷어 줄래?"
지원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 친구들에게 번호 순서대로 숙제를 가지고 나오게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지원이의 바람처럼 순서대로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지원이는 부반장 예은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은이가 숙제장을 정리하는 동안 지원이는 숙제를 내지 않은 아이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습니다.
고은희
변흥식
강미르
그러자 그동안 딴청 피우던 흥식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칠판으로 걸어가더니 이름을 쓱쓱 지워 버립니다.
"야! 변흥식, 너 정말 이러기야?"
지원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흥식이를 쏘아붙입니다.
"그까짓 숙제 좀 안 했다고 칠판에 이름 적을 것까지는 없잖아!"
흥식이는 지원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자리에 돌아가 앉습니다.
"흥식이 잰 정말 못 말린다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지원이는 반 친구들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예은이와 함께 숙제장 정리를 마무리하면서 지원이는 예은이에게 한심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아빠가 다니는 회사에서 사진 한 장 찍어 오는 게 뭐가 어렵다고 숙제를 하지 않았을까?"
아빠가 대기업에 다니는 지원이는 특별히 아빠 회사 사장님 자리에서 찍은 사진을 붙여서 제출했습니다.
"그게 어려워서 그랬겠니? 방학 내내 실컷 놀다가 숙제를 하기 싫었을 거야. 흥식이 쟨 원래 숙제 잘 안 해 오잖아."
예은이의 생각도 자기와 같다는 걸 확인하니 지원이의 기분이 사뿐히 풀립니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교실로 돌아오시자 지원이는 번호 순서대로 과제물을 정리하여 선생님 책상에 올려놓았으며, 은희와 흥식이, 미르가 숙제를 내지 않았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은희와 미르는 숙제는 했는데 깜박 잊고 못 가져왔다며 내일까지 가져오겠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미르와 은희는 내일까지 가져오도록 하고, 흥식이는 연구실 선생님 자리로 따로 가지고 오세요."
선생님 말씀에 남자아이들은 흥식이네 아버지께서는 무슨 비밀 회사에 다니시나 보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흥식이는 그저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다음날입니다. 며칠 전부터 태풍이 우리나라를 향해 올라온다고 난리법석을 떨더니, 결국 어젯밤에 가로수가 쓰러지면서 지원이가 등교하는 학교의 후문을 덮쳤습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서둘러 등교하던 지원이는 인도를 막고 쓰러진 나무를 보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후문 주변에는 시청에서 나온 아저씨들이 바쁘게 정리하고 있고, 교장 선생님도 나와 계십니다. 나무가 쓰러진 인도 옆으로 청소차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지원이는 중앙선에 가까운 차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위험해 보이지만 지각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걸음을 옮깁니다.
"아야!"
부러진 나뭇가지를 잘못 밟는 바람에 종아리를 살짝 긁힙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대단한 일도 아니었지만 멀찌감치서 시청 직원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정리하시던 소사 아저씨께서 달려오십니다.
"다친 데는 없니?"
지원이의 다리를 살펴보던 소사 아저씨는 별다른 상처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네가 4학년 1반 반장이로구나."
하십니다.
"어? 절 아세요?"
"하하하. 그럼,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반에서 인기도 좋다고 소문이 났는데, 모르면 간첩이지?"
듣기 좋은 소문이라니 지원이 기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늦었는데 어서 정문으로 돌아서 들어가거라. 조심해서 가야 한다."
지나가는 자동차를 세운 아저씨는 지원이가 안전하게 건너편 인도로 올라서는 것까지 지켜봐 주십니다. 가뜩이나 늦어서 갈길 바쁜 지원이는 짜증을 내면서도 소사 아저씨 생각에 미소를 짓습니다.
'참 친절하신 아저씨네.'
교실에 들어서니 만날 지각하는 흥식이도 벌써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흥식이 보다 늦었다는 사실에 지원이는 한 번 더 짜증이 납니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께서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자리부터 바꾸자고 하십니다. 지난번과는 반대로 이번엔 남자아이들은 복도에 나가 있고, 여자아이들이 먼저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습니다.
여자아이들의 자리가 정해지자 남자아이들이 차례로 들어와 앞줄부터 자리를 차지하는데, 나중에 천천히 교실로 들어온 흥식이가 두리번거리더니 마땅치 않다는 표정으로 지원이 옆자리에 가방을 툭 던집니다. 이렇게 해서 지원이는 흥식이의 짝이 되었습니다.
"하필 미르가 짝이 될 게 뭐야?"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만난 예은이가 지원이에게 투덜거립니다. 예은이는 시끄럽고 여자아이들 골리기 좋아하는 미르를 못마땅해했답니다.
"그래도 미르 정도면 괜찮지. 난 흥식이가 짝인데 뭘?"
"그건 그래."
지원이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예은이가 정말 잘 통하는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예은이가 묻습니다.
"참, 너 방학숙제 사진이 사장님 자리에서 찍은 거라며?"
"그럼. 당연하지. 그런 자리에 아무나 앉는 게 아니란다."
은근히 기다렸던 질문이지만 티 내지 않으려는 내색이 역력한 지원이의 표정을 예은이가 놓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흥식이 엄마도 너희 아빠 회사 다닌다고 하던데?"
"그래? 정말이야?"
아빠와 같은 회사라니 조금 기운 빠지는 얘기이긴 했지만, 역시 티 내지 않으려는 지원이의 표정이 살짝 흔들립니다. 그러면서 지원이는 갑자기 흥식이에 대해 관심이 생깁니다. 참다못한 지원이는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물티슈로 책상을 닦으면서 흥식이에게 슬쩍 물어봅니다.
"너희 엄마도 S 회사에 다닌다며?"
"어? 누가 그래?"
흥식이의 눈이 호랑이를 만난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합니다.
"누가 그러던데? 너희 엄마가 거기 다니신다고."
"지금은 다치셔서 안 다녀."
풀이 죽은 말투로 흥식이가 대꾸합니다.
"무슨 팀이셔? 우리 아빠는 경영지원팀이라던데."
"난 그런 거 관심 없어. 그러니까 너도 자꾸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책상을 힘껏 밀쳐 낸 흥식이는 성큼성큼 교실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깜짝 놀란 예은이가 흥식이 자리로 와서 소곤소곤 얘기합니다.
"아까 얘기하다 말았는데, 흥식이네 엄마는 S 회사 건물에 청소 나가는 거래. 새벽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신대."
"그런 얘기를 왜 진작하지 않았니?"
"말할 시간이 없었잖아. 그리고 뭐 다니는 건 맞잖아?"
수업이 시작했는데도 흥식이는 자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찾아 나서려는 데 소사 아저씨께서 흥식이를 데리고 들어오십니다.
"수업종이 쳤는데도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길래 데리고 왔습니다."
선생님은 소사 아저씨께 가볍게 인사하고는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외에 별다른 말씀 없이 흥식이를 자리로 돌려보내십니다. 흥식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자리에 털썩 앉습니다. 하지만 지원이는 새 짝이 된 흥식이에게 그날 온종일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습니다.
방과 후에 집에 돌아온 지원이는 학교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피아노 학원에 가져가야 하는 리코더를 학교에 놓고 왔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동생 승원이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돌아오시기 전에 리코더를 찾아오지 않으면 또 한바탕 벌어질 잔소리가 귓가에 맴돕니다. 지원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서둘러 학교로 향합니다.
후문은 정리가 끝나서 지나다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부러진 나무는 원통 의자처럼 둥지만 남겨 놓고 휑뎅그렁하게 잘렸지만, 잔가지와 나뭇잎은 여전히 주위에 굴러다닙니다. 조심조심 나뭇가지를 피해 가며 후문을 들어섰는데, 멀리 운동장 수돗가에 기대서서 발로 땅을 긁적이고 있는 흥식이가 보입니다.
'무슨 일이지? 아직 집에 안 갔나?'
하지만 가만히 보니 흥식이는 가방을 메고 있지 않습니다.
'나처럼 뭘 놓고 갔나? 아니면 집에 갔다가 놀러 나왔구나. 맞아. 흥식인 학원도 별로 안 다닌다고 그랬어.'
교실에서 리코더를 찾아 돌아올 때까지도 흥식이는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습니다.
'학원에도 안 다니면 심심하긴 하겠다.'
피아노 학원이 마칠 때쯤 엄마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스파게티 먹기로 한 약속은 '아빠가 일이 생겨서 취소되었으니 곧장 집으로 오라'는 명령입니다. 지원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휴대폰을 닫습니다. 주말에도 보기 어려운 아빠를 생각하면 평일의 약속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행 앞 사거리에서 지원이는 흥식이를 다시 봅니다. 학교 운동장에 있던 흥식이는 발에 깁스한 아주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나오는 길입니다.
'짝이 되어서 그런가? 오늘 자주 보이네.'
그러면서 지원이는 아주머니가 흥식이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다치셨다더니 다리를 다치셨구나.' 그때 흥식이가 병원 입구를 향해 외칩니다.
"아빠! 빨리 와서 엄마 좀 잡아 주세요."
"그래, 알았다. 약봉지 좀 챙기고……."
병원 입구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나오십니다.
'어? 저분은!'
지원이의 다친 발을 봐주시던 친절하신 소사 아저씨입니다. 그렇구나. 소사 아저씨가 흥식이의 아버지구나.
"흥식아, 엄마 퇴원 기념으로 치킨 한 마리 먹고 갈까?"
"예. 좋아요! 엄마도 치킨 드시고 빨리 낳으면 좋잖아요."
흥식이는 항상 말수도 적고, 거친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즐거운 표정의 흥식이는 너무 해맑아 보입니다. 만날 늦게 집에 오시는 바람에 평일에는 아빠를 뵐 수가 없는 지원이는 갑자기 흥식이가 부러워집니다. 멀어지는 흥식이네 가족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원이는 불현듯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어쩐 일인지 흥식이가 괘씸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다음날 일찌감치 등교한 지원이는 흥식이가 등교하자마자 다짜고짜 따지듯 묻습니다.
"변흥식! 너 왜 방학 숙제 안 해 왔어?"
"그 얘긴 왜 또 해?"
흥식이는 지원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대꾸합니다. 지원이 또한 흥식이가 뭐라고 하던 여전히 쌀쌀맞은 표정으로 자기 할 말만 합니다.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어쩐 일로 내 칭찬을 다 했더라? 예쁘고 공부 잘한다고 그랬다며?"
"누가 그래?"
"너희 아빠가."
뚱딴지같은 소리에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지원이를 쳐다보던 흥식이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어느새 얼굴이 발개집니다.
"어? 우리 아빠?"
"그래. 너희 아빠."
"네가 우리 아빠를 어떻게…… 알아?"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변한 지원이 와는 달리 흥식이는 입꼬리가 동그랗게 말아지면서 말꼬리가 흐물거립니다.
"어떻게 알긴, 나도 너처럼 너희 아빠 회사에서 공부하니까 알지."
도대체 무슨 얘기가 더 나올지, 이제 흥식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지원이를 바라만 봅니다.
"그러고 보니 흥식이 너하고 나하고는 천상 짝꿍인가 보다. 우리 아빠와 너희 엄마도 같은 회사에 다니고, 우리는 너희 아빠 회사에 함께 다니니까 말이야."
"그…… 그건, 우리 엄마는……."
흥식이가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데 지원이는 듣지 않겠다는 듯 말을 막아 버립니다.
"나도 너처럼 매일 아빠하고 같이 학교에 다녔으면 좋겠다. 속상한 일 생기면 털어놓을 수도 있고, 아빠를 기다렸다가 저녁도 같이 먹으러 갈 수 있잖아. 참, 치킨은 맛있게 먹었어?"
지원이가 새 짝 흥식이에게 한쪽 눈을 찡긋합니다. 비로소 태풍이 지나간 하늘처럼 흥식이의 표정도 밝아집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