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초석이 된 미완의 기록
H중공업에서 IT 기본 설계 프로젝트까지 남아 1인 볼모 생활을 하고 본사로 복귀하자마자, 나를 기다린 건 또 다른 유배지였다.
나를 H중공업에 남겨두었던 그 총괄 PM은 이번에도 "단 2주면 된다."는 달콤한 말로 경기도 기흥의 S자동차 연구소로 이끌었다. 방법론 교육과 템플릿 작성만 하면 된다던 그 임무는, 사실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심장을 설계하는 거대 프로젝트의 서막이었다.
1990년대 한국 자동차 산업은 이미 4강 체제가 형성돼 있었고, 그중 H사의 독주가 두드러졌다. S그룹의 자동차 사업 진출은 반도체 이후의 핵심 기간산업을 선점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자, 전자·금융·중공업을 잇는 ‘종합 산업 제국’ 완성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비록 일본 N사로부터 기술과 플랫폼을 빌려온 상업적 라이선스 고객으로 시작했지만, 현장의 사명감은 뜨거웠다. 그 결과물인 SM5는 정숙성과 마감에서 "역시 S가 만들면 다르다."는 찬사를 끌어내며 시장을 흔들었다.
하지만 화려한 데뷔 뒤에는 독자 기술력 확보라는 갈증이 있었다. N사는 핵심 설계 노하우는 철저히 감춘 채 플랫폼과 부품 수익만 챙기려 했다. 이때 한 중견 간부가 취약한 독자 기술력에 대한 우려를 사명감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는 신제품 기획부터 설계, 생산, 조달, 영업, AS를 아우르는 전 가치사슬에서 필요한 자동차 정보를 일원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개념을 정립했다. 길고 끈질긴 경영진 설득 끝에 결국 ‘Core-BOM’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BOM은 Bill of material의 약자로서 제품의 레시피다. 3만 개의 부품이 300여 개의 모듈로 얽히는 자동차 공정에서, 설계부터 AS까지 전 가치사슬의 정보를 일원화하는 '단 하나의 진실(Single Source of Truth)'을 Core-BOM이라 명명했다. 여기에는 각 부서마다 필요한 정보를 담는 Object-BOM과의 정합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교한 데이터 모델과 프로세스가 필수였다.
1년이 넘는 치열한 경쟁 끝에 IBM이 이 초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했고, 전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이 모여들었다. 상주 컨설턴트만 30여 명, 외국인 전문가가 10명이 넘는 글로벌 팀이었다. 2주면 충분하다던 방법론 교육과 템플릿 작성이 임무였지만, 첫날부터 마주한 현장의 난관은 그보다 훨씬 깊고 복잡했다.
독일과 일본의 선진 설계 문화를 익히 알고 있던 고객사 프로젝트 팀 일부가 IDEF3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는 정교했다. "자동차 설계는 수만 개의 부품이 얽히는 정밀 공학이다. 단순한 흐름도로는 부족하다. 각 공정의 인과관계와 And, Or, Xor 같은 논리적 분기를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는 IDEF3만이 이 복잡한 Core-BOM의 정합성을 보장할 수 있다."
반면, IBM 컨설팅 팀은 IBM DesignFlow를 고집했다. "IDEF3는 훌륭한 시스템 모델링 도구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설계실 안의 로직뿐만 아니라, 기획부터 양산, AS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전사적 가치사슬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 현업 부서들이 즉시 이해하고 움직일 수 있는 실행의 언어가 필요하다."
특히 자동차 설계의 꽃이라 불리는 '동시공학(Concurrent Engineering)'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최대 쟁점이었다. IDEF3는 그 복잡한 겹침을 수학적 논리로 분해하려 했고, DesignFlow는 그 겹침 속에서 발생하는 사람과 부서 간의 정보 흐름을 가시화하는 데 집중했다.
며칠간 이어진 논쟁은 양사 PM의 결단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는 지금 완벽한 설계 이론서를 쓰려는 게 아니다. 자동차는 설계실의 논리가 아니라, 전 부서가 공유하는 하나의 흐름 위에서 만들어진다. 현장의 맥락을 가장 잘 담아내고, 제조와 영업까지 즉시 소통할 수 있는 DesignFlow로 승부를 보자."
결국 DesignFlow로 확정되었다. 끝까지 IDEF3의 정교함을 아쉬워하던 멤버들도, 막상 DesignFlow로 그려진 전사 프로세스 맵에서 자신의 업무가 타 부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하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방법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일단락되자 내 소임도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거대한 프로젝트는 이제 막 닻을 올린 상태였다. 결국 나는 프로세스 팀과 데이터 팀, 그리고 까다로운 외국인 컨설턴트들 사이의 접점을 정교하게 잇는 '리베로'라는 그럴듯한 별명을 달고 2주 멤버에서 상주 멤버가 되었다.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된 외국인 컨설턴트들은 유럽, 미국, 일본의 유수 자동차 메이커에서 수십 년간 실무와 컨설팅을 두루 섭렵한 백전노장들이었다. 프로젝트의 공식 공용어는 영어였으나,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소통을 위해 현장에는 영어와 일본어 통역이 상시 동원되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동차를 설계하고 제조한다는 본질은 같았으나, 지역별 산업 발전 과정과 기업 문화의 차이에 따라 BOM을 바라보는 관점과 접근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수많은 회사와 브랜드가 연합된 형태인 유럽은 엔지니어링 표준화와 플랫폼 공용화에 집중했다. BOM은 ISO나 EURO 같은 국제 표준을 철저히 준수해야 하며, 이를 통해 기술적 엄밀함과 실용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자동차 대중화를 이끈 미국은 소비자 편의와 시스템 개방성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데이터의 호환성과 유연한 설계를 바탕으로, 분산된 데이터 환경에서도 시스템 간 인터페이스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장인의 나라로 불리는 일본은 제조 효율과 품질에 사활을 걸었다. BOM은 현재와 미래의 업무 프로세스를 완벽히 수용해야 하며, 무엇보다 데이터의 정합성과 정확성을 보증함으로써 단 하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통합적 연계를 강조했다.
이 시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삼성그룹의 혁명적 조치였던 '74제(7시 출근, 4시 퇴근)'였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던 신경영 선언의 일환으로 한국 기업 문화의 뿌리를 흔든 사건이었지만, 야근이 미덕이던 시대에 이 제도를 안착시키는 과정은 눈물겨웠다.
소속 회사가 다름에도 "한 팀이니 무조건 같이 해야 한다."는 고객 측의 요구는 무리에 가까웠으나, 고객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 겨울, 출근을 위해 새벽 5시 집을 나설 때 마주하던 차가운 공기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피부에 생생히 남아 있다.
프로젝트가 궤도에 오르면서 74제는 기이한 형태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70제'라 불렀다. 출근은 여전히 새벽 7시였지만, 하루 일과를 점검하는 총괄 미팅이 밤 10시에 시작되어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치고 50km를 달려 집에 도착하면 새벽 1시. 겨우 눈만 붙이고 새벽 4시에 다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가혹한 일정이 반복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나날이었다.
결국 회사에서 연구소 근처에 숙소를 마련해 주었고, 단 2주면 충분하다던 나의 임무는 다시 주말에만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로 복귀했다.
밤 10시, 모두가 퇴근했을 정적 속에서 우리의 진짜 하루가 다시 시작되곤 했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식어버린 음식과 빼곡한 DesignFlow 설계도가 뒤섞여 있었다. 흥미로운 건,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누가 S자동차 직원이고 누가 IBM 컨설턴트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서로의 소속을 묻는 대신, "이 로직에서 데이터 정합성이 깨지면 양산 시점에 대재앙이 온다."는 고민을 공유했다. 서로의 눈에 실핏줄이 터진 것을 보며 낄낄대고, 매점 캔커피를 나눠 마시며, 추운 사무실에서 손을 불어가며 버티던 그 시간들.
그것은 단순한 협력 관계를 넘어, 거대한 함선을 함께 띄우려는 '전우애' 그 자체였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언젠가 우리 손으로 만든 독자 플랫폼으로 세계와 맞짱 뜨겠다."라는 지독한 오기가 있었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첫 단추가 바로 이 'Core-BOM'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데이터 모델 하나, 프로세스 선 하나를 제대로 긋지 못하면 S자동차의 독립은 그만큼 늦어진다는 일치된 치열함이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상품기획, 설계, 제조, IT까지 각기 다른 곳에서 모였지만, '기술 자립'이라는 하나의 북소리에 맞춰 행군하는 거대한 군대와 같았다.
70제의 가혹한 일정 속에서도 우리가 웃을 수 있었던 건, 우리가 그리는 이 설계도가 S자동차의 '독립 선언서'가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외국인 컨설턴트들은 밤 10시에 시작되는 미팅을 보며 "Are you crazy?"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결국 그들도 우리의 기세에 눌려 자리를 지켰다. 그것은 광기라기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개척자들의 집념에 가까웠다.
S자동차는 단순히 신생 업체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 없었다. 외환위기의 서막 속에 흔들리던 K자동차를 인수하여, 단숨에 시장의 판도를 뒤엎고 자동차 대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들에게 Core-BOM은 그 거대해질 제국을 하나로 묶어낼 전사적인 신경망이었고, 프로젝트 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역사의 시계는 정반대로 흘렀다. 국가적 재난이었던 IMF 외환위기의 풍랑은 S자동차의 날개가 채 펴지기도 전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K자동차 인수는커녕, 정부 주도의 산업 구조조정인 ‘빅딜’의 도마 위에 오르며 오히려 정리 대상이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제까지 세계를 제패할 설계도를 그리던 연구소의 공기는 하루아침에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대의 파고 앞에서 개별 프로젝트의 논리는 무력했다. 거대한 시스템 구축은 더 이상의 동력을 잃었고, 결국 양사 합의 하에 IT 시스템 설계의 첫 삽을 뜨던 시작 단계에서 멈춰 서기로 했다.
3만 개의 부품을 하나로 꿰려던 원대한 시도는 그렇게 정리 수순이라는 차가운 단어와 함께 미완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첫 양산차 SM5가 도로에 나오던 순간은 한국 자동차 산업사에서 분명히 이질적인 장면이었다. 조용했고, 단단했고, 당시 국산차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정숙했고 "S가 만들면 다르다.”라는 말이 마케팅 문구가 아니라 실제 체감으로 다가오던 시기였다.
나 또한 SM5를 구매해서 사고로 폐차할 때까지 잔고장 하나 없이 2단 변속 시 꿀렁거림을 제외하고는 만족스럽게 운용했다. 아직도 도로에서 굴러다니는 초기형 SM5를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내 다음 차는 SM7이었는데, RN얼라이언스로 넘어간 이후의 불란서 차 감성은 더이상 내 취향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S그룹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자동차의 핵심을 모두 쥐고 있다. 만약 그때 S자동차가 독자 생존했다면, 한국은 기술 플랫폼의 나라로 더 빨리 진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기흥 연구소 화이트보드 위에 그렸던 Core-BOM 설계도는 헛된 노력이 아니었다. 프로젝트는 멈췄으나, 그곳에서 데이터 정합성과 프로세스 흐름의 본질을 깨달은 인재들은 대한민국 산업계 전반으로 흩어져 훗날 한국 제조업이 글로벌 품질 1위로 올라서는 디지털 설계의 단단한 초석이 되었다.
비록 프로젝트는 좌초되었으나, 그때 우리가 품었던 치열함과 기술 독립의 꿈은 대한민국 산업의 DNA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