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코피로 뚫은 글로벌 3위

천장의 나사에서 세계 정상급 룰 메이커로

by 류주복

지금은 우리나라 자동차가 BMW, 포르쉐, 페라리, 람보르기니와 드래그 레이스나 로드테스트에서 맞짱을 뜨는 영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냉정히 평가하건대 90년대만 해도 국산 자동차의 품질과 성능은 선진 자동차 메이커와 비교하기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내 첫 차였던 국산 소형차는 움직일 때마다 천장에서 나사 같은 게 또르르 굴러다니는 가속센서를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었다.


최근 전기차를 시승하며 내연기관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실감했다. 폭발적인 가속과 안정감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화재나 충전의 불편함도 그 주행 성능 앞에서는 사소한 투정에 불과해 보였다. 지금 가격에 초급속 충전 80%로 주행거리 500km를 뽑아주는 전기차가 나온다면? 허락받는 과정은 생략한다. 일단 지르고, 나중에 용서를 구하는 쪽이 훨씬 실용적인 선택일 것이다.


2000년대 초, HK자동차는 K자동차 인수 이후 불과 3년 만에 글로벌 메이저 제조사 문턱에 진입하였다. 국내에서는 독보적 1위를 고수하고 있었고, 글로벌에서도 저가 브랜드에서 메이저 제조사로 이동 중인 전환점에서 사실상 자동차 산업의 국가대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예상했던 세계 자동차 산업의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GM, 포드, 다임러벤츠, 도요타와 같은 초거대 회사들의 인수합병으로 결국 6-7개사만 살아남는 과점 체계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였고, 그 '최후의 생존자 리스트'에 한국 자동차의 이름은 없었다.


그 무렵 우리는 S자동차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 세계의 전문가들을 모아 HK자동차의 ITSP 및 차세대 BOM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연수원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고된 일정을 이어가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BOM, SCM, CRM 등 7개 영역별 분임 세션의 예산과 전략을 수립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리더급 인력이 공백이 생기는 긴급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내 팀 직원이었던 해당 영역의 담당 컨설턴트는 입사 2년도 채 되지 않는 주니어였다. 또 내가 '전문가인 척' 직접 등판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정적을 깨는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저라고 못 하겠습니까!"


그 자신감에 기대를 걸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밤늦게까지 함께 자료를 검토하고 리허설을 마쳤다. 다음 날, 나는 다른 세션을 챙기면서도 마음은 온통 그 회의실에 가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기어코 회의실 뒷자리에 앉았을 때, 똑부러진 목소리의 발표가 이어지던 오버헤드 프로젝터 위로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코피였다.


장내에 당혹스러운 정적이 흐르자, 고객사 부장님이 입을 열었다.


"아니, 매니저는 노는 것 같은데 직원이 고생이 아주 많네요. 이 정도 준비와 투혼이라면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내용은 충분히 알겠으니 00님은 가서 좀 쉬세요."


그는 혼자서 밤을 꼬박 새우며 백 번의 리허설을 반복했던 것이다. 내심 '노는 매니저'라는 말이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백만 배는 더 큰 대견함과 뿌듯함이 밀려왔다. 누군가의 성장이 나의 성공보다 더 달콤할 수 있다는 것. 그 당연하고도 낯선 사실을 그제야 온 마음으로 실감했다.



2026년 현재 HK자동차는 글로벌 판매 3위, 수익성 2위를 기록하며 프리미엄과 품질, 미래 기술 포트폴리오를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종합 모빌리티 그룹으로 평가된다. 브랜드 파워도 가파르게 상승해서 더 이상 '싼 맛에 사는 차'가 아니라 '일부러 골라서 사는 차'로 바뀌었다.


HK자동차의 성공 전략은 “늦게 출발한 약자가 할 수 있는 선택만을 극도로 일관되게 실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바른 방향으로 학습하고, 조급해하지 않고 통합하며, 끈질기게 확장해 온 시간의 승리다. 수많은 임직원들의 코피 투혼이 있었을 것이다.


가전제품이 디지털 전환을 통해 세계를 제패했듯, 자동차의 전기화가 우리 기업들이 업계의 판을 짜는 '룰 메이커(Rule Maker)'로 브랜드가 상승하는 결정적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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