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강당에 울려 퍼진 ABC Song

올바른 문제 정의로 현장 작업자와 부른 노래

by 류주복

“큰일 났습니다!”


K산업의 ERP 구축 프로젝트에서 협력사 부도 사건 이후 두 번째로 듣는 다급한 외침이었다. ERP 시범 오픈 첫날, 상황실 문을 부수듯 밀고 들어온 팀원의 얼굴은 창백했다. 2년 넘게 쏟아부은 땀방울이 실전 운영이라는 문턱에서 멈춰 서려는 순간이었다.


범인은 새로 설계한 ‘품번 체계’였다. 알파벳 1글자와 숫자 5자리를 조합한, 단순하고 우아한 체계였지만, 현장의 현실을 간과했다. 현장 작업자 중 상당수는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알파벳을 잘 읽지 못했다.


그들은 제품에 새겨진 글자를 그림처럼 베껴 썼고, 서무 직원들은 해독 불가능한 작업보고서를 보며 난감해했다. 시스템의 생명줄인 실적 데이터가 끊기자, ERP는 거대한 고철 덩어리 안에 갇혀 버렸다.


곧바로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품번 체계 전면 수정, 바코드 도입, 전담 인력 배치... 그 어떤 대안도 비용과 일정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했다.


그때 고객사의 한 사업부 프로젝트 리더가 침묵을 깨고 제안했다. “시스템은 잘못이 없습니다. 품번을 적는 게 문제라면 알파벳을 가르쳐서 제대로 적게 합시다. 당장 필요한 글자는 많지도 않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그 상황에서 누구도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시스템 교육 자료 마지막 페이지에 ‘ABC Song’ 악보를 붙였다.


첨단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축한 컨설턴트가 강당에 모인 현장 작업자들 앞에서 “에이~ 비~ 씨~ 디~”를 힘없는 목소리로 선창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대 IT기술의 정점을 걷는다는 자부심이 무너지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고객사 리더는 달랐다. 그는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게 하겠다는 의지로 목청 높여 노래를 불렀고, 손으로 허공에 알파벳을 그리며 강당에 모인 현장 작업자들을 이끌었다. 그의 진심과 열정은 전염됐다. 어느새 나도 목이 터져라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현장 작업자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손끝이 정확해지자 자괴감은 사라졌다. 대신 짜릿한 성취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조를 나누어 수천 명의 현장 작업자들과 2주간 ABC Song을 부르니 굳어 있던 시스템에 다시 생명의 피가 돌기 시작했다.


흔히 인용되는 ‘우주에서 기록하는 방법’의 비유가 있다. 무중력 우주선에서 볼펜의 잉크가 나오지 않자 미국은 거액을 들여 특수 펜을 개발했지만, 소련은 그냥 연필을 썼다는 이야기다. 안전상의 이유로 소련도 나중에는 특수 펜을 쓰는 게 팩트이긴 하지만, 이 비유가 주는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바로 ‘문제 정의’의 차이다.


미국의 문제 정의가 '무중력임에도 잉크가 나오게 하는 방법'이었다면, 소련의 문제 정의는 '기록하는 방법'에 집중한 것이다.


상황실의 문제는 ‘열악한 현장 상황을 고려한 시스템 보완’이었지만, 그 고객 리더가 정의한 문제는 ‘품번을 제대로 쓰게 하는 방법’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에 집중하자 비용 한 푼 더 들이지 않고 지연 없이 오픈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스템을 무사히 오픈한 후, 현장을 방문했을 때 영어를 가르쳐준 선생님이라 부르며 옥수수를 건네주던 작업자들의 투박한 손을 기억한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을 이해하고 연결하지 않으면 그저 차가운 코드일 뿐이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현실과 맞닿은 지점에서 올바르게 정의했을 때, 작은 노래 한 곡이 거대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열정적으로 노래를 선창했던 그 고객은 훗날 모그룹내 다른 계열사의 대표가 되었다. 올바른 문제 정의와 현장에 대한 존중이 훗날의 커리어를 어떻게 바꾸는지 그를 통해 배웠다.


자괴감으로 시작했던 ABC Song은 내 커리어에서 가장 짜릿한 성취감의 노래로 남았다. 기술은 결국 사람을 향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진리를, 나는 그 강당의 노랫소리 속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프로젝트는 늘 힘듬의 연속이지만,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기꺼이 수락하게 하는 건 성취감이라는 이름의 도파민이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6. 위기 탈출의 훌륭한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