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니들이 배를 알어?"에 답하다

조선소의 3차원 테트리스

by 류주복

가끔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승급’은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도 찾아온다. K산업 ERP 구축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나에게는 두 가지 승급이 동시에 찾아왔다.


하나는 2년간 매주 월요일 새벽과 금요일 밤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결과로 얻은 항공사 마일리지 최상위 등급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쁜 와중에도 얻게 된 소중한 둘째 아들이었다. 아들 낳으면 축하받던 마지막 시절이었다. 둘 다 어느새 서른 살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귀엽긴 하다.


그 무렵 글로벌 컨설팅 펌으로부터 오퍼도 받았다. 연봉은 좋았고, 비전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잦은 장거리 출장'이라는 문구 앞에서 와이프의 표정을 읽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가 애를 낳아 얻은 첫째 아들이 잦은 지방 출장을 다니는 아빠와 친해질 시간이 부족했다. 지방 프로젝트를 하느라 금요일 밤늦게 집에 도착하면 아빠가 낯설어 뒷걸음질 쳐 숨었다.


주말에 같이 놀면서 친해질 만하면 월요일 새벽에 자고 있는 첫째를 두고 첫 비행기를 타러 또 집을 나서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미안하다. 그런데 이제 둘째까지 태어났으니 더 이상 지방 프로젝트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수도권 근무가 가능하다는 지켜지지 않을 약속과 함께 신설 조직인 IBM컨설팅그룹 ICG(IBM Consulting Group)로 부서를 옮겼다. ICG 소속 컨설턴트에게만 부여되는 컨설팅 방법론과 전문적인 교육체계, 그리고 세련된 명함이 내 커리어 선택을 합리화해 주는 듯했다.


부서를 옮기자마자 숨 쉴 틈도 없이 고참의 손에 이끌려 내려간 곳은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 울산시에 있는 H중공업 조선사업부였다. IBM 컨설팅그룹의 내로라하는 시니어 컨설턴트들이 투입되는 프로젝트에서 한 달 동안 OJT를 받기로 했다.


H중공업은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조선업 탄생의 상징적 일화를 가지고 있다. 1970년대 초 한국은 배라는 물건을 한 척도 제대로 만들어본 적이 없었고, 조선소도 기술도 자본도 없는 상태였다. H그룹의 창업자 회장은 울산시의 바닷가 허허벌판에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려 했지만, 대규모의 해외 차관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 금융기관은 “조선소도, 실적도 없는 회사에 돈을 빌려줄 수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회장은 마지막 시도로 영국 런던을 찾아 은행에 영향력이 있던 조선업 컨설턴트를 만났지만, “이건 너무 무모한 사업”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순간, 회장은 주머니에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500원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배는 500년 전, 우리가 이미 철갑선(거북선)을 만들었던 증거입니다. 지금은 가난하지만, 배를 만들 수 있는 민족의 저력은 이미 증명됐습니다.”


이후 그 조선 컨설턴트의 보증과 추천으로 영국 은행이 차관을 승인했으며, H중공업은 조선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배를 건조하는 전례 없는 공법을 선택했고 실제로 첫 유조선을 완성해 인도했다. 이것이 H중공업의 출발점이다.


이 일화는 흔히 ‘이봐, 해보긴 해봤어?’라는 창업자 회장의 경영 철학을 대표하는 사례로 회자한다. 그 500원 지폐는 돈이 아니라 자신감을 담보로 한 배짱이었고, 그 배포가 한국 조선업의 출발점이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시작해 당시 이미 세계 최대 건조량을 자랑하던 H중공업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외적인 스케일도 어마어마했다. 정문에서 프로젝트 사무실까지는 여러 개의 공장과 야적장, 신호등을 지나고 나서 차량으로 20분이 걸렸다.


“저게 뭔가요?" 중장비들이 모여 흙을 쌓고 있는 광경을 보고 물었다. 야산을 허물어 야적장으로 쓰다가 원상 복구하는 중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프로젝트 종료 무렵에는 푸르른 소나무까지 울창하게 심어진 하나의 산을 보게 되었다. 현대판 우공이산이었다.


그만큼 생각과 행동의 스케일이 크고 허허벌판에서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만들었다는 긍지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러나 생산성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내부적으로는 "왜 일정은 매번 꼬이는가?"라는 본질적인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제조 기술은 최고였지만 설계까지 포함한 생산성은 일본 대비 70%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작업지시의 예를 들면, 주어진 시각과 장소에 특정 기술을 가진 작업자들이 작업을 해야 하는데 막상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면 작업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교한 생산계획과 스케줄링이 부족한 탓이다. 이로 인한 자원의 낭비가 심했고 결국 생산성 저하로 귀결되었다.


호선은 여러 개, 자원은 한정, 요청은 동시다발. 수주부터 인도까지 수십만 개의 부품과 인력이 얽힌 조선소는 그야말로 '조선소 판 3차원 테트리스'였고, 그 꼬인 흐름을 풀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유수의 대학들과 산학협력을 통해 신경망 추론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현장의 다양한 변수를 수용하지 못했으며 계산속도 역시 만족스럽지 않다는 평가였다.


현장에서 필요한 건 최소 한 시간 단위의 다이나믹 스케줄링인데 제한된 변수임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의 계산이 필요하다면 무슨 소용인가. 마치 일기예보 프로그램이 내일 날씨를 계산하는데 하루가 걸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기존 업무 프로세스와 IT시스템이 LNG선·컨테이너선·VLCC 등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전환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IBM은 조선사업부의 설계-생산-조달 프로세스 혁신 및 통합 정보시스템 기본설계 프로젝트를 제안하여 수주하였다.


IBM의 프로세스 혁신 방법론은 BPR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BPR, 즉 비즈니스 프로세스 리엔지니어링(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은 1990년 마이클 해머가 던진, 다 알지만 불편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발표한 'Reengineering Work: Don’t Automate, Obliterate'을 통해 “비용, 품질, 서비스, 속도와 같은 성과를 극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업무 프로세스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고 급진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프로세스 모델링에 IBM의 LOVEM(Line of Visibility Engineering Methodology)을 적용했다. 이 방법론은 1984년 Lynn Shostack이 제안한 서비스 블루프린트 개념을 토대로 고객 경험과 내부 프로세스를 시각화하여 특히 수주산업에 맞는 프로세스 혁신을 지원한다.


문서화를 위해 IBM이 개발하고 Sterling사가 유통한 그래픽 기반 CABE(Computer Aided Business Engineering) 툴을 사용했다.


LOVEM 방법론의 키워드인 가시선(Line of Visibility)이란 단어 그대로 '고객의 눈에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가르는 가상의 선이다.


가시선 위의 가시 영역은 고객이 직접 접촉하고 경험하는 활동 (예: 선주와의 미팅, 수주 협상, 시운전, 인도)이며 그 아래의 비가시 영역은 고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해 뒤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과 자원 (예: 조선소 내부의 자재 조달, 설계 로직, 블록 조립, 인사/재무, 행정)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비즈니스 문제는 가시선 근처에서 기인한다. 고객은 배가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가시선' 위의 기대치(공정률, 인도일, 외관)만 보고 판단한다. 하지만 실제 문제는 가시선 아래(공정 지연, 자재 누락)에서 발생한다.


가시선 차트(LOV Chart)를 그려보면 "어디서 병목이 생겨서 고객에게 불만으로 전달되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가시선 아래의 업무가 복잡하면 결국 가시선 위의 고객 기대치 충족이 불가능해진다. '3차원 테트리스'를 풀기 위해서는 이 가시선 아래의 엉킨 실타래를 정돈해야 했다.


프로세스 혁신이 말은 좋은데 거친 조선소 베테랑들에게 '고객 경험'이나 '방법론' 같은 단어는 우아한 사치로 느껴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프로젝트의 위기는 첫 현업 발표회 때 바로 찾아왔다.


현업의 생산설계 담당 고위 임원은 그 두꺼운 발표 책자 전체를 노란색 포스트잇으로 꼼꼼히 표시해 놓고 발표회 내내 질문 공세를 폈다. 처음엔 "당신들이 배를 만들어 봤어?"라는 식의 다그침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업 특유의 애로사항이나 혁신이 필요한 부분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IBM 혁신 전문가들의 신념도 못지않았다. 우리 총괄 PM을 비롯, 경험많은 경영혁신 컨설턴트들도 꿋꿋이 BPR 추진을 설파하며 TQC(Time, Quality, Cost)를 강조하였고, 선진 조선국을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BPR을 해야 한다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그 발표회의 분위기는 “월급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싸워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열했지만, 결과는 승자만 있는 훌륭한 무승부였다.


고객 프로젝트팀은 설계, 생산, 조달, IT에서 차출된 최소 20년 경력의 베테랑들이었다. 그들도 처음엔 "니들이 배를 알어?"라는 냉소 섞인 농담을 자주 했다. 그것은 “이 프로젝트, 우리한테 정말 도움이 되는 거 맞나?”라는 낯선 산업에서 온 컨설턴트에 대한 불안과 의심이었다.


현업 발표회 이후 그들의 태도에 약간씩 변화가 생겼다. "이게 일정 단축에 직결됩니다."라는 말 한마디는 마법처럼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과 함께 "내부 프로세스가 고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즉, "누가,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전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가시선을 넘나드는 데이터와 업무의 흐름을 As-Is 가시선 차트로 표현했다.


그러면 '연결이 끊어진 곳'이 엑스레이 찍듯 드러나게 되고 "내가 하는 삽질이 선주와의 인도 일정(가시선 위)을 잡아먹는구나"라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조선업을 잘 모르는 컨설턴트들이 방법론만을 통해 프로세스의 중복과 데이터의 단절을 시각화해 보여주자, 조선업 베테랑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시선 차트에서 발견한 문제 영역은 근본원인분석(RCA) 기법을 사용해 개혁/개선 아이디어로 도출한다. 여기에 고객 중심, 비부가가치활동 제거,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 IT에 의한 처리시간 단축 등의 TQC 지침을 반영하여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단계까지 To-Be 프로세스 흐름도를 작성한다.


조선업의 전문성과 컨설팅의 방법론이 결합하자 '수주에서 인도 기간 30% 단축'이라는 초 혁신적인 목표가 세워졌다. 그만큼 조직이 가진 잠재력도 컸다는 뜻이다.


OJT지만 고객에게는 OJT라고 말할 수 없는 홍길동 컨설턴트 신세로 4주였던 내 체류 기간은, 정식 컨설턴트 자격으로 3개월로 다시 6개월로 늘어났다. 매주 월요일 첫 비행기와 금요일 마지막 비행기를 타는 생활은 계속됐지만, 베테랑들과의 소통은 더 깊어졌다.


고객사에서 상주 프로젝트를 많이 해보신 분들은 공감하시리라 믿는다. 처음에는 낯설고 물선 환경에서 피곤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하지만, 고객과 깊은 소통이 최고의 진통제가 아닐까. 중독성도 있다.


조선소라는 거대한 전장에서 중요한 사실을 또 배웠다. 모든 조직의 문제는 복잡해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대부분 연결이 끊어진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프로세스와 프로세스, 그리고 데이터와 데이터 사이의 흐름이 막히면 시스템은 당연히 굳어버린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모든 프로세스의 전후 상관관계와 타이밍, 흐름을 면밀히 분석해서 끊어진 곳을 다시 이어주고, 데이터의 구조와 라이프사이클을 정비해서 막힌 곳을 다시 흐르게 만드는 것이다. 더 상세한 How-to는 전문가에게 돈을 내고 도움을 받아야 하니 단순하다고 해서 마냥 쉽지는 않다.


그때 사용했던 BPR 방법론이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BPR이 급진적 구조 조정이라는 의미로 변질되면서 그 명칭은 잘 쓰지 않게 되었지만 “업무를 왜 이 방식으로 하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디지털 전환(DX), 프로세스 혁신, 차세대 시스템 등의 단어가 BPR의 순한 맛 후손 격이다.


프로젝트 도중에 고객의 양해를 얻어 두 번의 교육에 참여할 수 있었다. OJT 기간이 끝나고 뉴욕시에 있는 IBM Palisades 교육센터에서 정식으로 컨설팅 방법론을 배웠다. IT시스템 기본설계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유럽 벨기에에 있는 IBM La Hulpe 교육센터에서 SAP R/3 PP 모듈 컨설턴트 인증을 받았다. 그제야 명함에 찍힌 컨설턴트라는 직함이 덜 부끄럽게 느껴졌다.


프로세스 혁신 컨설팅 종료 후에도 다시 고객 주도 기본설계 프로젝트에 '볼모' 생활로 추가 연장되었다. 낮에는 서로를 부장님, 선생님이라 부르며 날카롭게 검토하고, 밤에는 형, 동생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분들은 소주를 낱개 병 대신 24병들이 박스 단위로 주문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안주가 놓이기 전에 맥주잔으로 세잔을 들이켜야 했다.


덕분에 내 주량도 인생 최고 등급으로 '승급'했다. 항공사 마일리지 등급이 올라가고 명함의 직급이 바뀌는 것보다 훨씬 값진 승급이었다. 그 승급이야말로 현장의 베테랑들이 나를 '진정한 우리 팀원'으로 인정해 준 순간이 아닐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뜨거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운 사람과 사람 사이 '연결의 원칙'은, 이후 내 커리어를 지탱하는 견고한 닻이 되었다.


"당신들이 배를 만들어 봤어?"라며 무섭게 다그치던 고객 임원이 생각난다. 현업 발표회때 보여준 그 치열함이 결국 그분을 조선사업부 사장까지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거기에, 꿋꿋이 BPR을 설파하며 그 실행방법을 고민했던 컨설턴트들도 지금 우리 조선업이 전 세계에서 초격차 개발력, 납기, 가성비를 확보하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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