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박평식의 TMI를 아카이빙하며 알게 된 사실
최근 씨네 21에서는 <2020년 대한민국 10대 관객 리포트>라는 기획기사를 냈다. 거기서 롯데시네마를 이용하는 10대 관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 중 "신뢰하거나 참고하는 영화 전문가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이 있었다.
이동진이 2위인 건 납득이 가능한 결과다. 이동진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TV, 라디오, 팟캐스트 등에 출연하며 영화나 책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영화감독들의 인터뷰집이나 평론집까지 출간했다.
그가 자리하는 GV는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가리지 않고 매진사례를 기록할 정도다.
심지어 구글에 빨간 뿔테를 검색해도 상단에 이동진이 나올 정도로 그는 유명하다. '라디오스타'나 '놀면 뭐하니'와 같은 MBC 간판 예능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박평식의 경우, 이동진처럼 미디어 활동 이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본인의 이름으로 책을 낸 적도 없다.
인터넷에서 그의 얼굴을 찾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촬영 시점을 가늠할 수 없는 사진 두 장만이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인터넷 상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평식은 꽤나 유명한 영화평론가다. 그리고 10대 관객이 신뢰하고 참고하는 영화 전문가라는 사실이 개인적으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느닷없이 박평식에 관해서 자료를 아카이빙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그 아카이빙의 결과물이다.
6.25 전쟁이 발발한 해가 1950년이다. 박평식 평론가는 1950년 6월 24일 출생이라고 한다. 무려 만 나이로만 따져도 69세다. 그러나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51년생이라고 나와있어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이렇게 나이가 지긋하신 분... 을 인터넷에서는 모두 '평식이 형'이라고 부르고는 한다. 오프라인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박평식을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 같다.
본래 박평식은 연출을 지망하여 서울예술대학 영화학과를 졸업했다.
하길종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었으며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1980)과 이황림 감독의 <달빛 멜로디>(1984)의 연출부였다.
하지만 하길종 감독의 타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본 뒤의 무력감 등을 이유로 연출을 포기하고 평론계로 입문했다고 한다.
(구글링을 해보니 무려 1997년에 기독신문이라는 매체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영화'라는 시리즈로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에 관해서 쓴 칼럼이 있었다)
1988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사랑, 그 인간 구원의 미학-배창호론>이 당선되며 박평식은 영화평론가가 되었다.
그는 90년대에 영화평론가로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개봉 영화와 관련해 코멘트를 덧붙이기도 하고, 영화캠프나 시나리오 공청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부터 1999년까지의 신문자료를 아카이빙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박평식 평론가의 올곧은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2001년, 청룡영화상 정영일 영화평론상 부문에서 박평식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박평식 평론가는 수상을 거부했다.
청룡영화상을 주최하고 후원하는 측이 조선일보라는 이유에서 수상을 거부한 것이다.
이 초유의 사건은 당시 논란이 있었던 월간조선의 <애기섬> 비판 기사와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일보라는 언론사의 근본에 관해서 문제의식을 삼은 것으로 보인다.
본래 외국에만 있던 별점 시스템과 20자 평 문화를 90년대 초반에 국내 언론사에서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 씨네 21이 창간했다. 씨네 21도 이 별점과 20자 평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박평식이 씨네 21에 별점과 20자 평을 쓴 시기는 1997년 여름부터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2010년, 씨네 21 창간 15주년 기념 인터뷰는 박평식이 가장 최근에 참여한 인터뷰이기도 하다)
1988년부터 평론가가 된 그는 당연히 수많은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 박평식 평론가는 영상물등급위원회 소속의 위원이기도 하다. 그는 2000년대 초부터 영화 등급 분류 위원이 되었다고 한다. 2004년의 씨네 21 기사에서 그가 위원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영화 등급 분류 위원이 되면 국내에 들어오는 모든 영화의 등급을 정해야 한다. 그래서 극장에 걸리는 국내 개봉 영화들은 전부 보게 된다는 의미다.
극장에 개봉하는 영화에는 실질 개봉작과 형식 개봉작이 있다.
실질 개봉작이란 극장에서 연간 상영회차가 40회 차 이상이며 극장에서 상영되는 걸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형식 개봉작이란 극장에서 연간 상영회차가 40회 차 미만으로, 사실상 온라인 VOD 서비스를 겨냥해 형식적으로 개봉하는 영화다. '형부'나 '처제' 같은 친척 호칭이 들어간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대표적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2019 한국영화산업결산>에 의하면 2019년 한 해에만 개봉한 한국영화의 실질 개봉작은 199편이고 외국영화 중 실질 개봉작은 448편에 이른다. 총 647편이다.
한 편에 대략 2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1294시간이며, 이를 하루에 해당하는 24시간으로 나누면 약 54일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 영화 등급 분류 위원이 된다면 영화의 등급을 가늠하기 위해서 이러한 실질 개봉작을 사실상 다 봐야 할 것이다. 보고 싶은 영화만 볼 수 없고 보기 싫은 영화도 어쩔 수 없이 봐야 한다.
이를테면 누가 봐도 VOD 서비스용인 형식 개봉작으로 보이는데 어째서인지 실질 개봉작으로 극장을 통해 개봉한 아래의 영화도 등급 분류 위원이라면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것이다. 직업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보통 똥망 영화를 보고 나오면 시간이 아깝기 마련이다. 그리고 분노하기 마련이다. 종종 볼 수 있는 박평식의 분노 어린 영화평은 본인의 직업으로 인해 불행히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싶기도...
한편 박평식은 언젠가 인터뷰를 통해서 평론가라는 직업에 관해서 의의를 밝힌 바도 있다.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인물 기타 정보에 명시된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전투적인 평론가로 남고 싶다."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의 공격적인 한줄평이 '전투적'이라는 말과 잘 맞기는 하다.
위 사진에서 주목해야 할 박평식의 말이 다름 아닌 "때로는 인간관계의 단절까지 감수해야 하는 몹쓸 직업"이라는 내용이다. 친분과 관계없이 누군가의 작품에 쓴소리도 해야 하는 게 평론가의 운명.
실제로 신혼여행을 같이 갈 정도로 친했던 감독의 영화를 평가했다가 인연이 끊긴 적도 있다고도 한다.
인연이 끊긴 것도 서러울 텐데 어떤 영화에서는 '박평식'이라는 이름의 악당이 등장했다고도 한다. 박평식이라는 이름이 흔하다고 볼 수는 어렵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그 의심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박평식'이 악당으로 등장한 영화 <용서는 없다>의 감독인 김형준은 2006년 개봉작인 <공필두>라는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공필두>의 유일한 기자・평론가 평점은 박평식이 남긴 별 1개 반이다.
'박평식'이라는 악당의 이름이 실제로 과거 악연(?)으로 인해서 지어진 것인지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어떤 감독들에게 박평식이라는 존재는 악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가장 최근 인터뷰인 2010년 씨네 21 기사에서 나오듯, 박평식 평론가는 고소장과 으름장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20자 평은 임팩트가 세기도 하고 영화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전투적 평론가가 되고 싶었다는 그는, 실제로 전투적인 별점과 20자 평으로 네티즌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2013년부터 박평식은 네티즌들에게 '평식이 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루리웹, 디시인사이드, dvdprime과 같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박한 별점과 독특한 20자 평으로 인해 '평식이 형'이라는 존재가 점차 바이럴 되기 시작했다.
아예 박평식이라는 이름 자체가 '박한 평가와 식견'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라는 해석이 난무할 정도로 그는 영화계의 소금쟁이, 소금 왕이라 불렸다.
심지어 그를 '혹평 전문가'라고 칭하며 나온 한겨레의 칼럼 기사도 있다.
이 기사에서는 당시 박평식 평론가가 대중들에게 비난받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박평식이 주목받는 이유는 주로 ‘관객들이 좋아하는 영화’에 혹평을 내려 해당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비난받기 때문이다.
흔히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는 다른 경우를 보게 된다. 그래서 대중들은 박한 평가와 현학적 언어를 구사하는 평론가를 비판하고 평론가는 보는 깊이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대중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기사 속에 나온 예시로 영화 <리얼 스틸>의 네티즌 평균 평점은 9점을 넘지만 박평식은 '각본이 고철보다 더 녹슬었으니'라며 4점을 남겼다. 이에 대한 어느 네티즌의 박평식에 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실제로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박평식에 관한 네티즌의 여론은 지금에 비하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무늬만 평론가이고 본업은 악플러다'라는 비난 댓글을 당시 커뮤니티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박평식 특유의 '전투적인' 평가는 그의 영화 식견이 '깐깐하다'는 여론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박평식이 좋게 평가한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위키트리나 씨네 21에서는 박평식이 좋게 평가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지금까지도 만들고 있다.
이렇게 화제가 되다 보니 박평식 평론가의 평점 기준에 관해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박평식 평론가의 경우, 별 5개를 준 10점 만점의 영화는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그가 지금까지 9점을 준 영화도 10편에 불과하다.
사실상 거의 9점이 만점이라고 봐도 될 정도인가 싶다. 아예 박평식 평론가의 기준이 그렇다고 말한 기사도 있다. 정작 본인이 직접 별점의 기준에 대해서 밝힌 바는 없다.
그리고 아예 '박평식 평점은 정말 짠가?'라는 기사도 있다. 박평식, 이동진, 김형석 등 평론가뿐만 아니라 CGV, 다음, 네이버 영화 등 네티즌과 관객 평점까지 비교한 내용이다.
저 기사의 결론을 말하자면 박평식 평론가의 평점은 저 비교군 중에서는 가장 짠 것으로 밝혀졌으나 이동진의 평점과 비교하면 그리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인상 깊은 도표는 관객 100만 명 이상인 영화의 별점보다 관객 100만 명 미만인 영화의 별점이 현저히 높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박평식 평론가의 20자 평은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평"이라는 식으로 많은 네티즌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사실 박평식의 재미있는 영화평은 거의 대부분 만듦새가 조악한 영화인 경우였다. 아무래도 영화의 모양새가 농담에 가까우면 농담을 하기 더욱 수월할 수밖에 없다.
영업정지를 선언한 <요가학원>과 등교 금지를 선언한 <4교시 추리영역>. 실제로 이 두 영화의 평가가 나란히 있던 페이지를 읽고 엄청 웃었던 기억이 있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는 시리즈에도 가차 없다. 2007년에는 <택시 4>에 폐차장으로 직행할 일만 남았다더니, 2018년에는 <택시 5>에 폐차장으로 가라고 가차 없이 말한다.
언어유희가 돋보이는 20자 평은 어느 순간부터 네티즌들에게는 하나의 meme이 되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박평식이 별점과 20자 평을 남긴 매체가 씨네 21이라는 점도 그의 인기(?)에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로드쇼, 키노, 프리미어, 매거진 M 등 영화잡지들이 자취를 감추는 와중에 다행히도 씨네 21은 폐간되지 않았고 얼마 전에는 25주년을 맞이했다.
씨네 21은 무엇보다 사이트에 아카이빙이 잘 되어있고, 그 덕분에 우리는 박평식의 4230개나 되는 별점과 20자 평을 볼 수 있다.
이제 박평식은 평론가라는 직업을 상징하는 고유명사처럼 불리기도 한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평가하거나 평론하는 유튜브 콘텐츠의 제목에 박평식이라는 네이밍을 사용한다.
그런데 정작 인터넷에서 박평식 평론가가 작성한 긴 분량의 평론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1990년대에 그가 쓰던 영화 리뷰를 몇 개 찾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사실 신문 지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현재 그가 20자 평이 아닌 글을 연재하는 유일한 곳은 영상등급위원회. 하지만 영상등급위원회에 한 달에 한 번 쓰고 있는 영화 관련 글도 평론이 아니라 칼럼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박평식 평론가가 제대로 된 평론을 쓰지 않는데 그가 과연 평론가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박평식에 관해서 정보를 아카이빙 하다 보니 아래 결과에 대한 이유를 나름대로 알 것 같았다.
10대인 Z세대가 좋아할 법한 평론가의 조건을 그는 다 갖추고 있던 것이다.
박평식은 꾸준하다. 짧은 20자 평이더라도 20년 넘게 남긴다는 건 대단하다. 그리고 그의 20자 평은 보자마자 박평식이 썼다고 알 수 있을 정도로 특색 있다.
박평식은 소신 있고 전투적이다. 영화평론상을 거절할 정도로 소신 있고, 친분과 관계없이 박한 별점과 가차 없는 20자 평을 휘두를 정도로 전투적이다.
박평식은 흥미 있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그의 20자 평은 언어유희와 임팩트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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