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만 60곡 넘게 발표한 기리보이의 인터뷰들을 보며 배우다
힙합이 대세인 시대다. 힙합을 기반으로 한 아이돌이 등장하고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여전히 생기고 있다. 하지만 힙합 뮤지션의 노래가 차트 1위를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는 아직 많지 않다. 사재기를 한다면 모를까.
기리보이의 노래는 작년에만 차트 1위를 두 번이나 기록했다. 1월에는 그가 프로듀싱한 '띵'이 1위에 올랐고, 6월에는 그가 프로듀싱하고 노래까지 부른 '교통정리'가 1위에 올랐다. 자신의 음악들로 대중성을 인정받은 그는 작업량도 어마 무시하다.
2019년만 놓고 봤을 때, 기리보이는 본인의 이름으로만 정규 앨범 2개와 EP 및 싱글을 7개 발표했다. '고등래퍼3'과 '쇼미더머니8'에 프로듀서로 출연하면서 많은 곡을 작곡한 기리보이는 최근 '라디오스타'에 출연해서 2019년에만 만든 노래가 60곡이 넘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노윤호, 제시카, 우원재 등 뮤지션들의 노래에 피처링으로도 참여했다. 힙합 씬에서 엄청난 작업량을 과시하는 더콰이엇, 코드 쿤스트 같은 뮤지션도 기리보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고 할 정도다.
기리보이는 다소 어눌한 발음과 정제되지 않은 문장을 구사하는 말버릇 탓에 '0개 국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딩고 프리스타일의 웹 예능이나 '쇼미더머니'에서 그가 말할 때, 자막에는 '...' 같은 문자가 많은 이유다. 이러한 기리보이의 무해하고 어리숙한 이미지가 친근함을 더해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는 창작에 관련된 가치관을 보면 결코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기리보이는 꾸준히 좋은 창작물을 내고 있는 뮤지션이다.
꾸준히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존 그리샴은 하루에 한쪽 소설 쓰기를 거르지 않았고, 김훈은 하루 5장씩 소설을 쓰는 '필일오'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소설의 대가들도 꾸준히 창작하는 습관을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원칙을 정했다. 그런데 꾸준히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꾸준하게 '잘' 해내는 것이다. 최근 기리보이의 인터뷰들을 나름 심도 깊게(?) 찾아보면서 꾸준하게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게을러질 수 없는 세기가 온 것 같아요. 진짜 핸드폰으로 다 할 수 있잖아요. 그냥 누워서도 가사를 쓸 수 있고 컴퓨터에 안 앉아있어도 작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는데 여기서 게으름을 피우면, 그건 변명이다. 이런 생각을 해요. 이런 세상에서 게을러진다는 것이 너무 나쁜 일이라고 해야 하나?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현재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장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좋은 장비가 있더라면 작업물의 퀄리티도 분명 좋아졌을 것이다. 또한, 지금 현재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 무언가를 만들기 어려운 시대인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넷플릭스 신작, 하고 싶은 모바일 게임 등을 몇 번의 터치 만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창작력과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지금까지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핑계를 댈 때 주로 하는 말이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게으름과 핑계의 레벨도 비례하여 발전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게으름과 핑계는 나에게 이로울 게 없다. 글이 쓰기 싫어질 때, 컴퓨터 앞이 아니라서 쓸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이제는 기리보이가 힙합엘이 인터뷰에서 말한 저 문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언제나 스마트폰은 거의 내 손 근처에 있기 마련이다. 스마트폰에는 기본 메모부터 노션, 베어, 에버노트 등 훌륭한 어플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스마트폰을 쥐고 있으면서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하는 건 비겁한 변명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어느 강의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영상물을 만드는 사람 중 장비 탓을 하는 이가 있다면 고개를 들어 박찬욱과 션 베이커를 보게 하라. 박찬욱은 아이폰만 가지고 '파란만장'이라는 단편을 찍었고, 션 베이커도 아이폰으로만 '탠저린'이라는 88분짜리 영화를 만들었다. 결국 장비보다는 내용과 기획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운동을 4달 동안 꾸준히 하다 보니 이런 에너지로는 뭐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창작에 관해서 말할 때 체력 문제는 언제나 중요한 화두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0km씩 달리기를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화는 유명하다. "체력이 창의력"이라는 가사를 쓴 스윙스도 운동광이 되었고, 매일 운동하듯이 비트를 만드는 수련을 거쳐 직접 모든 노래를 작곡한 앨범을 내놓기도 했다. 어쩌면 스윙스에게 영향을 받아 기리보이도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기리보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헬스장으로 걸어간다고 한다. 원래 택시를 타고는 했지만 이제는 걸어가는 것도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이언티가 진행하는 라디오 'SAP'에 출연해서 기리보이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현재 4개월 동안 꾸준히 운동을 했다고 한다. 꾸준히 운동을 해서 체력과 에너지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 연기 수업을 받고 기타도 연습하고 있다고 한다. '금요힙합'에 출연해서 자신이 만약 어린 시절 운동에 빠졌다면 지금 손흥민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수도 있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기리보이는 본인이 운동을 시작한 시점인 4~5개월 전에도 이미 왕성한 에너지를 뿜어내지 않았나 싶다. 수많은 노래를 만드는 뮤지션인 동시에 레이블 위더플러그와 파티 크루 우주비행을 결성했으며 의류 브랜드 I4P까지 론칭했다. 사실 그는 이미 운동을 하기 전에도 뭐든 하고 있던 사람이기는 했다.
힙합 하는 사람들은 그냥 아이디어를 쓰는 느낌으로 곡을 만든다.
'라디오스타'에서 김구라는 자신의 아들이 한 곡 쓰는 데 몇 개월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리보이는 그렇게 오래 걸릴 이유가 없다며 힙합 뮤지션들은 그냥 아이디어를 쓰는 느낌으로 곡을 만든다고 답했다. 김구라의 아들이 실제로 곡 만드는 데 몇 개월이 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리보이가 아이디어를 사용하는 느낌으로 곡을 만드는 건 맞는 말인 듯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수많은 곡을 발매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많은 작곡가들이 히트곡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할 때 5분 만에 곡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5분 만에 어떤 한 곡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지 5분 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기본적으로 살아가면서 영감을 얻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기리보이는 라디오 'SAP'에서 "가사를 쓸 때 흘러가는 대로 쓸 때도 있고 메모장에 적어둔 걸 참고할 때도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힙합엘이의 인터뷰에서는 "원래 적었던 거랑 가사가 달라도 다른 대로 쓰고, 영어 가사도 틀린 채로 내기도 한다."고도 말했다. 고민보다는 창작을 하고 결과물을 내놓는 걸 중요시하는 그의 태도가 다작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같다.
기리보이는 수많은 노래들을 발표했기에 수많은 아이디어를 확인할 수 있다. 우원재의 노래 '호불호'와 오르내림의 노래 '브레이킹 배드'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가사를 보면 정말 의식의 흐름에 의해 쓰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키치 하다. 반면, 키보드 숫자 위의 특수 문자를 인용해 연애 관계를 표현한 '키보드'나 최근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 한 연예인들에게 위로를 보내는 듯한 '꽃'의 가사를 보면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다작을 하는 사람이 기발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증거.
'힙합플레이야'의 '금요힙합'을 보면 기리보이가 얼마나 엄청난 덕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금요힙합'은 좋아하는 음악을 선정하고 설명하는 프로그램인데 기리보이는 지금까지 출연한 뮤지션 중 유일하게 거의 한국 노래로만 리스트를 꾸려나갔다. 이른바 '국힙' 덕후인 그는 실제로 국내 힙합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준비하려고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힙합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힙합엘이와의 인터뷰에서는 브로콜리너마저, 검정치마, 짙은 등 인디밴드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금요힙합'에서는 자신의 인생곡으로 양희은의 '당신 생각'이라는 노래를 꼽기도 했다. 또한, 성시경이나 김동률의 발라드도 좋아하며 실제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을 때에는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을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원래 테크노나 베이스 하우스를 좋아한다고도.
기리보이는 어떤 장르의 팬이기보다는 음악 자체의 팬이다. 동시에 좋아하는 음악들을 자신만의 색깔로 칠해서 만드는 뮤지션이기도 하다. 베이스 하우스를 좋아하는 성향은 '옛날거', 퓨처 베이스를 좋아하는 성향은 '파티피플', 인디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성향은 '하루종일'과 같은 노래에 잘 녹아들어 있다. 기리보이라는 한 명의 아티스트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이 그의 덕력을 증명한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자'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어차피 집에 가도 할 거 없다'라는 느낌이 더 큰 것 같아요. 진짜 집에 가도 할 게 없거든요. 누워 있기만 하고... 그럴 바엔 작업실에서 좀 더 만져보자고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혼신의 에너지를 쏟는 경우가 많다. 창작을 위해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엄숙한 태도. 보통 작업실이나 카페에 앉아 '이 시간만은 집중해야 돼.'라고 말하는 식이다. 하지만 경험상 이러한 진정성 있는 마음가짐은 창작을 하는 데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만들어낸 부담감에 짓눌려서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어렵게 해버리고는 했다. 그리고 어렵게 만들어낸 결과물이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이경미 감독은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에서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 매일 다짐해야겠다.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본인의 창작관을 밝혔다. 뭐, 굳이 쓰레기를 쓰겠다고 생각할 필요까지 없지만 그만큼 창작할 때 완벽주의보다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더 도움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경미는 쓰레기 같은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나 글쓴이가 아니다.
라디오 '랩 하우스 온 에어'에 출연한 기리보이는 "별 생각 안 하고 편하게 작업했을 때 잘 만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쉽게 생각하자는 거다. '열심'과 '노력'이라는 무게감 있는 키워드에서 벗어나서 초연한 듯이 '집에 가도 할 거 없다'라고 생각하며 창작한다면 어쨌든 쉬워진다는 것.
좋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일단 나는 한다.
창작물에서 성적이나 보상은 중요한 요소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 같은 잔잔바리 글을 쓰는 사람들도 글을 올리고 공유나 하트를 신경 쓰곤 한다. 하지만 지금껏 브런치를 하면서 많은 공유나 하트를 받아본 적은 없다. 신경 쓸 게 있어야 신경을 쓸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기리보이처럼 차트 1위에도 몇 번씩 올랐던 뮤지션이라면 신경 쓸 게 참 많을 것 같다. 그런데 힙합엘이 인터뷰에서 기리보이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처음에 음악을 시작할 때 차트 성적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이걸 더 바라고 있으면 내 본분을 잊는 느낌"이라며 성적에 관한 생각을 밝힌다. 1위라는 자리를 맛본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
요지는 결과에 일희일비할 시간에 일단 음악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일단'이라는 부사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일단' 만들어내는 것이 창작자의 본분이며 이에 따른 결과는 나중에 신경 써야 될 부분이라는 점. 어떻게 하면 기리보이처럼 될 수 있을까 생각하지 말고 '일단' 창작하는 태도를 유지하자.
주요 참고 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0sWsIi3Arqc
https://www.youtube.com/watch?v=BkqMhrcRGdE
https://www.youtube.com/watch?v=kqGm3GJRtkw
http://hiphople.com/index.php?mid=interview&page=2&document_srl=14386607
[네이버 나우 - S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