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야 보이는 진실
학교에서 2학기 방과 후 신청 알리미가 왔다. 가을이는 친한 친구가 생명과학을 신청했다며 자신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금껏 방과 후 활동은 아이들의 자유의사에 맡겼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지역 외국어센터에서 영어캠프 방과 후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경쟁률이 높아서 매번 탈락을 맛보았던 터라 너무 반가웠다. 영어학원도 다니지 않는 아이에게 원어민과 수업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좋은 찬스. 무료에 수업반응도 엄마들에게 굉장히 좋았다.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생명과학과 같은 시간대라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일단은 경쟁률이 높기 때문에 가을이에게 묻지 않고 신청했다. 떨어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붙으면 그때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며칠 후 결과가 문자로 통보됐다. “귀하의 자녀가 2학기방과 후 영어캠프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기쁨도 잠시 고민이 시작됐다. 친구가 1순위인 아이가 뭘 선택할지는 당연한 결과였기에. 어떻게 설득해야 넘어올지 잘 생각해야 했다. 고민 끝에 가을이의 기분이 좋을 때 당근을 주면서 넌지시 물어봐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가을아, 외국어 센터에서 하는 영어, 경쟁률 엄청 높은 거 알지? 그런데 이번에 5학년만 방과 후 신청을 받더라고, 그래서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 선정이 됐네. 수업 퀄리티가 좋다고 하고 원어민 선생님들이랑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같은데 해보는 게 어때? 수업 가는 날에는 그날 개인공부 영어도 다 빼줄게”
“싫은데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신청해? 강요하지 마.”
사춘기 아이와 대화는 사치인 걸까? 강요란 말에 꽂히기 시작했다. 하지 않아도 될 말 들이 주절주절 나오기 나왔다. “ 언제 강요를 했니? 좋은 기회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 너한테 좋은 기회라서 해보라는데 내가 너한테 부탁해야 하니? 엄마 공부, 네가 대신해 주는 거야?”
내뱉고 나면 항상 후회되는 말들. 왜 하지도 않아도 될 말들을 삼키지 못하는 것일까? 화내고 반성하고 후회가 반복되는 되돌이표.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나 자신이 지겨워졌다.
잠깐의 쉼표, 가을이의 표정을 보고 ‘꿀꺽.’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은 상황임을 느꼈다. 때로는 침묵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니까.
며칠이 지나도록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 욕심이 가라 않기를 기다렸다. 가을이에게도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문득문득 어떤 조건을 내걸어야 가을이가 내 말을 들을까 싶기도 했지만 점차 나의 마음은 아이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 주 주말. “가을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 아까운 경험이니 한 번 가보고 결정하는 건 어때? 해보지 않으면 뭐가 너한테 더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잖아.” 가을이는 순순히 체험수업을 들어보겠다고 했다. 수업을 다녀온 후 어땠는지 물었다. “ 원어민 선생님도 3분이나 들어오시고 영어 동아리 보다 나은 거 같아.” 그럼 그렇지, 아이의 말에 나의 욕망이 또 꿈틀대기 시작했다.
“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 일단 생각해 볼게, 파일이랑 이름 다 만들어 놓고 왔거든 그런데 영어 동아리랑 두 개나 해야 해?”
“아니, 영어 동아리는 안 해도 되지, 별로 도움 안 됐잖아, 하나 정리하고 영어캠프 가는 날은 수영까지 가니까 그날 개인공부도 학습지만 하고 다 빼줄게.”
꿈틀대던 욕망은 끝내 내 밑바닥까지 보이게 했다. 나의 말속에는 아닌 척, 강요가 들어있었다. 아이의 약한 부분을 잘 아는 엄마의 힘을 빌려 내 뜻대로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강요. 그러면서 가을이가 엄마를 그렇게 봤다는 이유로 화를 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 침묵으로 인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을이는 3일 후 친구와 생명과학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생명과학에서 민호랑 은우랑 같이 수업 듣는 게 더 좋아.”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던 나는 실망했다. 하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 발 물러서 체험수업을 한 것만으로 가을이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됐다. 이번에는 나의 차례다.
이번 경험을 놓쳤다고 가을이의 영어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닐 테다. 할 공부가 줄어들 수 있었지만 그 공부도 하겠다고 한다. 영어 동아리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아이에게 어떻게 더 얘기하겠는가. 아쉬운 마음은 나의 욕심. 내 욕심은 내가 처리해야 할 감정.
이번 경험으로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내 욕심으로 할 수 있는 건 나의 일일 뿐. 아이에게 나는 기회의 제공자, 그 이상 그 이하여도 안 된다. 때론 그 어떤 말보다 침묵이 강하다. 강요하는 엄마가 되지는 말자. 선택은 아이의 몫. 그 성공과 실패도 아이의 몫. 그 결과가 내가 되지는 말자.
어떻게 좋은 선택만 하고, 성공만 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실패 속에 내가 몰랐던 다른 길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자식은 실패 없이 탄탄대로의 길로만 가길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 하지만 그렇게 자라서 정작 본인이 선택을 해야 할 때에 실패의 경험이 없다면 아이는 더욱더 좌절할 것이다.
오늘의 작은 실패가 교훈이 될 수 있게, 그 교훈으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을 갖춘 어른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게 엄마의 마음. 그런 미래를 위해 오늘의 아이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아이의 실패를 격려해야 한다.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배운다. 엄마의 욕심으로 아이의 경험을 가로채지 않는 엄마가 되길. 너의 성공에 누구보다 기뻐하고 너의 실패에 의연한 엄마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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