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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다 Sep 19. 2024

‘아이를 손님처럼’, 불가능을 꿈꿉니다.

사십춘기, 사춘기를 이겨먹으며 행복해하는 하루.

“엄마, 마라탕 먹으러 가자.”

여느 집 애들같이 가을이도 마라탕과 탕후루를 좋아한다. 사춘기가 온 아이가 엄마와 함께 먹으러 가자고 하면 내심 반가운 마음이 마중 나온다. ‘그래 아직은 친구보다 엄마지’ 물주의 역할이란 걸 알면서도 나만의 착각에서 행복을 찾는다.


사춘기 아들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잠잠하면 고맙고 돌연 뾰족한 말이 비수처럼 날아든다.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는 상태의 하루하루. 맑은 얼굴도 마라탕을 함께 먹으러 가자는 아이가 반가운 이유다.


가을이의 기분에 따라 나의 기분상태도 널을 뛴다. 흐뭇했다, 열이 올랐다, 폭발했다, 반성했다가. ‘사춘기 아들은 하숙하는 손님같이 대하라’ 이렇게 생각하라고들 하지만 나는 욕쟁이할머니가 된다. 가을이가 엇나가면 나도 더 엇나가고 싶어진다. 마흔이 넘으면 잔잔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마흔 춘기를 겪는 소녀처럼 내 감정은 태풍주의보상태다.


아이들을 키우며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나아지겠지, 좀 더 편안해지겠지 생각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고행의 시간도 함께 존재했다. 육아는 계단모양의 인생. 평평한 길에 갑자기 오르막길이 있기도 하고 비포장도로가 찾아오기도 한다. 한숨 겨우 내쉴 때쯤 찾아온 평화. 언제부턴가 그 평화가 귀이 여겨졌다. “아 좋다, 이런 게 행복이구나.” 고요한 일상이 소중하다는 걸 육아를 하면서 알게 됐다.


주말의 오후. 뒹굴 거리는 아이들, 차 한 잔 마시면서 그런 풍경을 보는 게 좋다. 힘든 순간이 없었다면 그 평화의 순간이 행복이구나를 알 수 있었을까? 철없이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뭇하게 들린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사춘기의 시간도 지나가겠지. 몇 년 뒤엔  사납던 가을이의 모습도 그리워할지 모를 일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낙관하는 법으로 사춘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계속 그래왔듯이. 내가 괴로워하고 애쓴다고 해결되는 일이 없기에.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힘든 일은 떨쳐 버린다. 때로는 시간이 약이 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 힌트가 선물처럼 찾아오기도 하니까.


하지만 가끔 복수를 꿈꾼다. 사춘기 아들의 모든 모습이 소중하지는 않기에. 괘씸함이 차오르면 심통을 부린다. 주로 바쁜 척을 한다. 대꾸해 줄 시간이 없는 것처럼. 나도 심통 부릴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알아달라는 듯이. 그리고 오늘처럼 온화하게 무언가를 요청하면 생색을 낸다. 마라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힘들지만 너를 위해 함께 먹어주겠다고.


얼마 전에는 가을이가 실과시간에 여가시간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 내 여가시간이 가장 적었어.”

“왜 그럴까? 피아노 40분, 수영도 50분밖에 안되고 다 너의 여가시간일 텐데.”

“개인공부시간이 많아.”

“얼마나 되는데?”

“6~7시간.”

“말도 안 돼, 네 체크리스트에 저번 주 개인공부시간 계산한 거 가져와봐.”

자신이 A라고 믿으면 철저한 데이터 없이는 곧 죽어도 A라고만 우기는 아이이기에 얼마 전부터 공부 예상시간, 걸린 시간을 체크하고 있었다.

계산해 보니 1~2시간, 가을이는 자신이 기록한 데이터를 확인하고서야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이대로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며칠 동안 가을이 얼굴만 보면 놀려대기 시작했다. “아들, 공부시간 6~7시간 채우려면 학교 끝나고 자기 전까지 공부만 해야 돼 얼른 해,”

“어차피 공부만 시키는 엄마가 된 거 그 시간 채우고나 욕먹자, 자지 말고 6~7시간 채워.”

며칠 동안 같은 말을 듣던 가을이는 노이로제가 걸릴 거 같다고 했다.

“엄마, 내가 진짜 잘못 했어, 그러니까 그 말 좀 그만해. 내일 학교 가서 여가시간도 다시 고쳐 놓을게.”


‘앗싸, 이번에는 내가 이겼다’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사춘기 아들이 굽히고 들어오는 순간의 희열이 있다. 자기 말만 하고 부모의 말은 모두 잔소리로 듣기 시작하는 사춘기에 대한 복수의 순간. 지금 생각해도 너무 꼬시다. 아무래도 나는 마흔 춘기를 제대로 겪고 있는 중인 거 같다.


내 작았던 삶에 두 아이가 스며들고 있다. 없는 것에 집중하고 남 탓만 하던 삶에 아이들은 소소한 행복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러면서 내 삶의 반경이 조금씩 넓어진다. 힘든 날이 있어 웃는 날이 더욱더 행복한 줄 알고 내 품 안에서 재잘대는 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그 모습들을 눈으로, 사진으로  많이 남겨둔다.


힘이 부치는 날도 있다. 그런 날엔 혼자 밖으로 나가 걷기도 하고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나 자신을 소중하게 다뤄줄수록 아이들에게 친절한 엄마가 된다는 걸 알기에. 점점  아이들의 정면보다는 뒷모습을 보면서 살아가는 삶이 익숙해지겠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멀어져 가는 거겠지. 그래서 지금의 이 순간순간이, 더욱더 소중하다. 어느 날은 웃기도 할 거고, 또 어떤 날은 화를 못 이겨 폭발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알 거 같다. 화를 내는 엄마도, 친절한 엄마도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걸. 사랑표현의 서투름이 그렇게 발현되는 걸일 뿐. 시간이 지나면 나의 사십 춘기도 너의 사춘기도 또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그 안에 변하지 않는 건 우리의 끈끈한 하루들이 우리를 붙잡아 줄 거라 믿으며 오늘 하루를 힘차게  보내본다.






사진출처: 내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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