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몰에서 '부자의 기준'을 찾다.
"엄마, 우리 집 가난해?”
가을이가 묻는다. 건조하게 우리 집의 재정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다. 고학년이 되면서 친구 집만 다녀오면 한 마디씩 한다. “엄마, 은재네 아빠 차는 그랜저인데 진짜 좋더라.” “엄마, 진우 네는 하와이 갔대.” “엄마 지우 네는 노트북이 4대나 있더라.” 예전엔 순수하게 놀다만 왔다면 요즘엔 부러워 보이는 것들을 열 지어 늘어놓는다.
“가난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100만 원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누군가는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을 부자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돈이 많다고 꼭 행복하다고도 볼 수도 없지.”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조언이었다.
나도 아직 가난과 부자의 기준을 잘 모른다.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고 큰 걱정이 없이 산다면 부자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많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 좋은 차를 타고 철마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방학 때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이 더욱더 내 귀에 툭툭 들려온다. “엄마 민재 베트남 갔대.” “은재도 제주도 갔대.” 괜스레 양심이 찔린다. 올해는 짧은 여름휴가 계획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방학이 짧다는 이유로 움직이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다른 이유를 댔다. 가을이의 일주일 영재원 수업과 엄마의 첨삭수업일정. 시간 맞추기 힘드니 가까운 곳에 물놀이나 가자고 얘기했었다.
“이번 방학에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일 있어?” 미안함에 아이들에게 묻는다. “바닷가 2번 정도 가고, 워터파크 한 번” 생각보다 아이들의 계획은 소박하다. 일단 아이들과 바닷가와 가까운 수영장에 다녀왔다. 두어 번의 물놀이에 우리 부부는 넉 다운. 매년 체력이 다르다는 걸 우리는 아이들과의 외출에서 깨닫는다. 아직은 한 번 남은 물놀이를 위해서 우리는 체력 비축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집에서 뒹굴뒹굴 거리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물놀이가 아닌 체험거리를 찾아 나선다.
여름의 외출은 시원해야 한다. 정적인 놀이보다 한 가지나마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해야 한다. 검색 끝에 우리 부부는 수원스타필드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시원하고 별 마당 도서관은 전부터 내가 가보고 싶어 했던 곳. 맛있는 거 좋아하는 가을이 맞춤, 맛 집들이 즐비해 있고 단풍이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최애 오락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간과했다. 우리 가족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하필 우리가 간 날은 광복절이었고 광복의 기쁨을 쇼핑몰에서 많은 사람들과 기뻐하며 맞았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차들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지하 8층까지 주차장에서 끝없는 강강술래를 하고 나서야 겨우 주차를 하는 행운을 맛보았다. 그 기쁨도 잠시 지하 8층에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줄을 보고 또다시 감탄. 복합 쇼핑몰은 빨간 날에 가면 매운맛을 보게 된다는 법칙을 우리는 쉽게 망각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향했다. 애매한 층에서 내려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보다 위층에서부터 구경을 하고 내려오자는 취지였다. 7층은 식당들, 먹으려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우선은 가을이의 운동화를 사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피부가 예민하고 발볼이 넓은 가을이는 운동화를 고르는 일이 매우 까다롭다. 운동화를 신을 때마다 이건 아니야, 발이 불편해, 닳는 느낌이 이상해, 1년에 두 번은 이 까탈스러운 손님을 모시고 신발 매장을 돌아야 하는데 그날이 오늘이었다.
예민한 손님은 스캔 후 한 마디면 충분했다. “이건 아니야.” 그 후의 뒤처리는 나의 몫. 매장 직원에게 신발을 다시 건넨다. 다른 운동화 사이즈를 부탁한다. 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된다. 나의 표정은 죄송함과 불편함 사이에서 어서 이곳을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민한 손님은 눈치 못 챙기고 쇼핑에 열중이다. 계속된 부탁과 죄송함으로 가을이를 조용하게 겁박한다. “대충 사라.” 엄마의 슬슬 끓어오르는 열감을 캐치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난한 검은색의 운동화를 집어 든다.
그 모습을 보고 오래 기다렸다는 듯 단풍이가 조용히 다가온다. “엄마 오락실, 오락실 가자.” “나는 배고픈데.” 가을이다. 거기에 사람 많은 쇼핑몰을 질색하는 남편은 별 말은 없지만 표정으로 무언의 압박을 하고 있다. ‘나 여기 빨리 벗어나고 싶어, 피곤해’ 이 사람들과 왜 쇼핑을 왔을까?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일단은 먹고 보자는 여론으로 우리는 7층으로 향했다. 40여 분의 대기 끝에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딤섬과 탕수육, 짜장면과 짬뽕은 옳았고, 음식들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식당에서 나오며 가을이가 한 마디 했다.
“먹고 나오니까 다들 표정이 너그러워졌어.”그 말에 우리는 다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제 서야 내가 보고 싶어 했던 별 마당 도서관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웅장했다. 꿈에서나 그리던 고요하고 따뜻해 보이던 풍경. 그 속에서 책을 한 권씩 들고 옅은 미소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아이들과 함께 나도 그 풍경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얘들아 사진 찍자, 여기가 그 유명한 도서관이야 멋지지.” 나의 호들갑에 비해 아이들은 시큰둥했다. “응, 멋있네.” 엄마가 찍자고 하니 선심 쓰듯 사진한 장 찍고 아이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오락실 가자, 오락실.” 완벽한 동상이몽이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시작한 외출이었으니 나의 사심은 접어두고 오락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엄마가 사진을 찍든지 말든지 해사한 표정을 선보였고 계산을 해줘야 하는 엄마, 아빠를 위해서 전에 없던 애교들을 내보였다. 그 표정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린 부자였네, 사소한 추억을 함께 나누며 웃을 수 있잖아.”
사진출처: 내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