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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가지 Sep 02. 2024

사라져라! 배암.

서정주,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작품 출처 및 해석 참고 : 생각의 탄생 | 블로그

 https://naver.me/GNUQAqvx




 70대 후반의 아버지는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은 인생의 뒤안길을 걷는 중이다. 애증의 아버지…

 서정주의 ‘화사(花蛇)’를 알기 전부터 나에게 아버지는 기독교 세계관에서 ‘뱀’으로 대변되는 ‘사탄’과 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어떤 문예백일장 대회에 나가 ‘아버지’라는 주제를 보고 아버지를 루시퍼에 비유하여 시를 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아직 10살이 채 못 되었을 때, 아버지는 엄마의 가장 친했던 친구와 불륜을 저지르고 우리를 떠났다. 아니, 아버지가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그 시절 모델을 했어도 충분했을 170 가까운 훤칠한 키에 여리여리한 몸매, 고운 얼굴에 착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는 할머니의 과잉보호로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와 연애결혼을 하셨다. 망막색소결핍증을 앓고 계셨던 어머니는 언젠가 빛조차 보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잘 웃고 노래도 잘해서 좋았다고 했지만, 훗날 내가 다시 아버지와 결혼한 이유를 물었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맹(全盲)이 아니라 약시(弱視)였기에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곧 암흑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은 어머니를 위축시키이게 충분했고, 장애가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과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약간이라도 세상을 볼 수 있는 아버지에게서 희망을 찾았다. 그러나 그 선택은 평생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내 생일날, 내가 조르고 졸라 어머니께서 생일선물로 사 주신 책상 의자를 아버지가 번쩍 들어 올리더니 어머니를 내리쳤다. 어머니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모시고 급히 병원으로 갔다. 얼마 후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하셨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니가 왜 이혼을 결심하셨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저 어머니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나는 사이,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남편과 친구를 동시에 잃은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자라났다. 




 고등학생 때인지 대학생이 되어서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서정주의 ‘화사’를 처음 읽었을 때 강력하게 각인된 뱀의 이미지는 내 기억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아버지의 이미지와 매우 닮아 있었다. 아버지의 불륜은 원초적 욕망에 따른 행동이었으므로 '소리를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는 욕망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 역시 소실(小室)이 있었으니 아버지의 불륜은 할아버지로부터 대물림되어 온 쓴 뿌리였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원죄라면 내 아버지에게도 원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나는 폭력적이고 무능하고 부도덕하기까지 한 아버지가 보고 싶지는 않았으나, 지하철이나 시장에서 장애를 가진 분들이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했기에, 어디에서 구걸하며 지내는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들 때마다 어머니를 배신하는 것만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나의 모순된 심리는 ‘화사’에서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길 / 저놈의 뒤를 자꾸 따르는' 시적 화자의 모습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아버지는 원래 쌍둥이였다고 했다. 그런데 먼저 태어난 형이 한국 전쟁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파편에 맞아 실명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할머니로서는 큰아들의 죽음과 작은 아들의 장애가 평생 가슴의 한이 되셨을 터였다. 그래서였을까. 장애인이라고는 본 적 없던 할머니는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장애가 있는 자식이 험한 꼴을 당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그러셨을 테지만, 그 결과 아버지는 오로지 라디오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전부인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 또래의 동네 젊은이가 교통사고로 맹인이 된 것을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는 그 청년과 아버지를 친구가 되게 하셨다. 청년은 이미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던 중 사고를 당했던 터라 맹학교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맹인의 사회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에서 지정한 직업교육의 일환으로 안마협회에 가입해 안마를 배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친구를 따라 안마협회에 등록했고, 그 친구의 소개 덕분에 우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집 밖에 나와 자신을 ‘오빠’라고 불러주는 여동생에게 느끼는 호감을 사랑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버지보다도 눈이 어두운 며느리를 평생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결혼할 때 외에는 단 한 번도 할머니를 거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혼 후 할머니 손에 강제로 끌려가 몇 번의 유산을 해야만 했고, 유산을 피하기 위해 아기가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에 가족에게 알렸을 때도 여지없이 낙태를 당해야만 했다. 산모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도 있는 젊은 새댁의 잇따른 낙태 수술에 의사 선생님조차 안타까워했다. 오기가 생긴 어머니는 언니를 잉태했을 때 죽을 각오로 버텼다고 했다. 언니와 나는 엄마가 오랜 세월을 견뎌 힘들게 얻은 생명이고 가족이었다. 어머니로서도 가족 중 비로소 어머니 편이 생긴 순간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우리를 잘 키우면 시댁에서도 며느리로서 인정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할머니는 신생아 때 유독 새까맸던 언니를 보고는 “저걸 애라고 났니?”라고 하셨고, 아버지를 닮아 뽀얗게 태어난 나를 보고는 “애가 핏기가 하나도 없구먼.”하고 휙 돌아 나가셨다고 했다. 그게 다였다. 아버지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아기를 돌보거나 귀여워할 줄 몰랐다. 육아는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리고 몸을 제대로 돌볼 여유도 없이 또 돈을 벌기 위해 나가야 했다. 

 아버지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무능함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눈과 귀를 닫아버린 저열함과 비겁함에 화가 났다. 그런데도 내 마음 한편에 인간적인 연민이 스미는 것은 왜일까. 나 역시 타락한 이브의 후손이기 때문인 것일까.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한때 사랑했고 아이들의 아비였던, 나의 아버지가 없는 그 시간을 어머니는 신앙의 힘으로 버티셨다. 교회에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며 나 역시 하나님께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못난 아버지의 빈자리를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채워주시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계신 아버지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지난날의 일들을 사과하고 싶으니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연락을 하셨다. 방문하는 가족 하나 없이 요양원에서 쓸쓸히 늙어가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다가도, 그 오랜 세월 가족을 돌보지 않고 무책임하게 지냈던 세월을 생각하면 원망하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 그나마 늦게라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굳이 우리까지 용서해야 할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미움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나의 영혼을 좀먹는 행위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반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징계를 내리시지 않느냐며 나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우리는 호세아가 아니었고, 예수님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나에게 아버지는

 '사라져라! 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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