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대 고독'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자기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
선악의 경계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이 경쟁하는 시대
합법화된 민주화 시대의 저항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
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
옳음도 거짓도 다수결로 작동되는 시대
진리는 누구의 말에서나 반짝이지만
그것을 살고 실천할 주체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혁명의 전위마저 씨가 말라가는
이 고독한 저항의 시대는
- 박노해 시집『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수록
20세기의 끝자락에 대학생이 되었다. 그 무렵 우리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떠올리며 세기말이라는 불안감과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뒤숭숭한 시간을 보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처럼 21세기에는 사람들이 홀로그램처럼 반짝이는 옷을 입고 알약 하나로 영양을 보충하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닐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이변은 없었다. 21세기가 되는 마지막 순간에도 제야의 종은 울렸고 우리는 목도리를 꽁꽁 동여맨 채 동해바다로 일출을 보러 갔으며, 장엄한 해돋이를 보고 난 후 여느 때처럼 가락국수 한 그릇을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도 순탄한, 너무도 익숙한 일상에 너털웃음을 웃으며.
어문학부로 진학한 나는 2학년이 되어 전공배정을 받으며 ‘꼴굿떼’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민중가요 동아리였지만 우리가 부르는 ‘거리에서’는 힘이 없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픈 과거의 추모였을 뿐 더 이상 우리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가 하는 것은 고작해야 기억하고 기리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인터넷이라는 강력하고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학계에서 문학의 죽음을 논할 때, 우리는 노가리를 씹으며 민중가요동아리가 있어야 할까를 이야기했다.
지적 허영심에 들어간 ‘현대문학연구회(현문연)’에서는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다시 읽었다. 동화적인 작품의 분위기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인물 군상들의 이야기가 묘한 매력이 있으면서도 무언가 모를 억울함과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몇 해 지나 일산의 한 대안학교에서 <난쏘공>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정의란 무엇인지, 우리에게는 당연한 이 권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는지, 그렇게 힘들게 얻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책을 읽고 토론하고 가르쳤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미인가 대안학교로서 유명한 책의 저자이자 강연가로 지역에서는 나름 유명세가 있던 교장 개인이 출자하여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과 함께 세운 학교로, 공교육이 무너진 현실에서 자신의 딸을 보내고 싶은 학교를 직접 설립한 것이라 했다. 이름은 학교지만 건물 두 개 층을 임대하여 운영하는 학교로, 대안학교에 대한 기준이 뚜렷이 마련되지 않은 시기에 설립된 학교 중 하나였다. 학교 설명회에서는 학교 설립 이후 정부의 인가 기준이 몹시 까다로워져서 현재 미인가 상태로 남아있지만, 대안학교 인가 기준을 조정해 줄 것을 교육청과 국회 등에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고 학교로서도 인가를 받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12년 동안 여전히 미인가상태였고, 학교도 학원도 법인도 아닌 ‘개인 사업장’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학생 지도에 헌신적이던 처남이 초대 교감이었고, 대학 후배가 행정실을 맡았으나 초대 교감 선생님께서 수학여행 중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소천하신 후에는 고등 전담 교사를 맡고 있던 아내가 교감직을 이어받았으며, 홀로 행정 업무를 맡던 대학 후배가 유명을 달리한 이후에는 매제가 행정실을 맡게 되었다. 학교장으로 치러진 교감선생님의 장례와는 달리 고 행정부장님의 경우 교장이 교사들의 조문을 막았었는데, 사실 확인은 할 수 없었으나 후에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학교 공금에 손을 대었다가 발각되어 자살한 것이라 했다.
20대에 처음 학교에 들어갔던 나로서는 거의 첫 직장이었기에 열정에 눈멀었던 터라 재직 초기 나의 관심은 오로지 학생들과 수업에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40대에 가까워지자 학교의 운영을 비롯한 인사 방식 등이 부당하고 비민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10년 이상 함께 동고동락한 동료 교사들과 소통하면서 막연했던 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학교 운영이 투명해지기를, 협동조합이든 법인이든 정관을 갖춘 단체로서 학교 구성원이 책임감 있고 떳떳하게 교육 활동에 참여할 수 있기를 꿈꾸며 교사 모임을 만들고 협의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교장이 모든 교사를 한 곳에 모으고 서류에 서명을 요청했다. 그동안 납부하지 않았던 원천징수를 납부해야 한다는 세무서의 지적이 있었다는 말과 함께, 한꺼번에 이를 납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테니 퇴직금을 중간정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교장이 개인 사업자로서 납세를 해 온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동안 수입은 있었으나 내가 직접 원천징수를 납부한 적은 없었기에 그래야 하나 보다 하고 별말 없이 서명을 했다. 그럼에도 찜찜함이 남는 것은 왜일까 생각하면서. 그때 학교 설립 때부터 계시던 한 선생님께서 퇴직금을 사업체에서 일방적으로 정산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며 언짢아하셨다. 그제야 내가 찜찜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고,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너무도 한심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는 너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부당한 사회에 당당하게 맞서라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는 소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있는 것이 학생들 앞에 부끄러웠다. 그 무렵, 학교 밖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시위가 한창이었다. 광화문을 환히 밝힌 촛불을 보면서 대학 시절 그토록 외쳤던 ‘행동하는 지성’과 내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새삼 느꼈다.
우리 교사들은 그저 학교가 투명하게, 민주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리는 순진하게도 학부모 총회 때 그동안 교사들이 겪었던 부당한 처우에 대해, 학교의 비민주적인 운영 방식과 불투명한 회계처리에 대해 몇몇 동료교사와 함께 소신 발언을 했다. 교장은 당시에 모든 게 자신의 불찰이라며 반성한다고 했으나, 바로 다음날 소신발언한 교사들에 대해 고소할 것이라는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교사 징계위원회도 열렸다. 교사들이 발언한 내용은 불확실한 정황에 기초한 것이며, 학교 경영 상의 비밀을 발설하여 학교 운영과 발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내용증명을 받은 교사들은 모두 분개했다. 그리고 법적 대응은 물론 그동안 교사의 사명감으로 기꺼이 담당했던 부분들에 대해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기로 했다. 우리는 변호사와 노무사를 찾아갔고, 자습감독, 학교 자율프로그램 등 각종 근무시간 외 근로 내역에 대한 증빙자료를 갖추고 그동안 우리가 말없이 감당해 왔던 노동의 대가를 교장에게 요구했다. 그 금액은 개인 당 천만 원이 넘었다. 그것이 정당한 나의 권리 찾기라고 여겼다. 내가 믿는 하나님도 불의에 저항하는 것을 기뻐하시리라 여겼다.
그런데 동료 선생님과 아침 묵상을 나누던 중, 다윗의 이야기가 자꾸 떠올라 마음을 찔렀다. 이미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음에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음에도 왕좌를 당연한 자리라 여기지 않고 사울에게 쫓겨 다녔던 다윗, 부당하게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왕의 권위를 인정한 다윗. 다윗을 묵상하면서 나의 권리 주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동안 불평만 하고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지 않은 것이 회개가 되었다. 며칠인가 고민과 기도 끝에 함께 소송으로 맞대응하기로 했던 선생님들께 말씀 묵상을 하면서 괴로웠던 마음을 나누고 소송에서 빠지기로 했다. 동료 선생님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여전히 비겁한 소시민이라는 자책이 한쪽에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그것이 말씀에 순종한 것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렘29:11~13)”이라 하셨는데, 그 이후의 삶은 평안이 아니라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중에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 그것을 두 번, 세 번 점검하고 확인하고 실행에 옮겨 이직한 그다음 학교에서 나는 광야와 같은 3년을 보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하나님의 이끄심이라 확신하고 이직한 학교에서 3년 간 나는 매일의 큐티 생활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생각했으나, 뒤돌아보면 ‘이러다 과로사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낸 고단한 날들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면 감사와 평안이 있었어야 하는데, 3년 간 나는 늘 불안했고 부족한 자신을 자책했고 그래서 더 나를 갉아먹었다. 내 혈기를 내려놓는 광야라고 생각했으나, 내 힘으로 아등바등 버틴 3년이었다. 그 기간 동안 엄마 없는 빈자리를 메꾸시며 묵묵히 손녀들 뒷바라지하시던 시어머님께서는 해마다 암 선고를 받았다. 암 선고를 세 번째 받았을 때, ‘아, 멈추라고 하시는 거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 사직 의사를 밝히고 사랑하는 공동체를 나왔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롭고 떳떳한 삶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일까.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이 가장 모범적인 답안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으나, 내 힘으로는 절대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지난 세월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게 능력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시선은 여전히 굶주리고 헐벗고 고통 속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9)”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해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차별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들은 있으나 고통의 이유도, 문제 해결 방법도, 주체도 상실한 시대. 이에 대해 시인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이자 “옳음도 거짓도 다수결로 작동되는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체들은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지난한 싸움”이 되어 “그것을 살고 실천할 주체가 증발되어 버린 시대”가 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내가 이 시대를 구원할 수는 없다. 투쟁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만큼 대단한 실천을 할 수는 없다. 정답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는 있다. 물론 이 역시 내 힘으로는 부족하지만, 적어도 “나 하나 지키”기 위해 매일 “지난한 싸움”을 기꺼이 싸워나갈 수는 있다.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노래한 조동화 시인처럼, 나 한 사람이라도, 한 발짝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