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더미들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시 본문 출처 https://m.poetnews.kr/1821
고단한 학교 일상을 어영부영 마무리하고 방학을 맞았다. 시적 화자인 춘향이가 '수양버들나무'와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떨어지고 싶었다면,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서 최대한 떨어져 있고 싶었다.
2월. 방학 동안 충분히 쉬면서 연수도 듣고 책을 읽으며 나를 긍정의 에너지로 채웠다. 새로운 아이들을 맞이할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처음부터 회색빛이었던 양, 언제 빨았는지 알 수 없는 교실 커튼도 빨고 작년 우리 반 아이들이 잔뜩 흔적을 남긴 교실벽에 페인트 칠도 했다. 작년에는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어 반 아이들에게 다소 소홀했던 만큼 올해는 학급에, 우리 반 아이들에게 충실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3월이 되었다. 한창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 수줍은 꽃봉오리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굳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고운 피부에 화장을 하느라 등교 시간에 아슬아슬 오는 아이도, 수업 시간에도 깨발랄하게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화사하게 웃는 아이들도 모두 꽃처럼 예뻤다. 하지만 예쁘다고 다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아이들과 틈만 나면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잔소리였을 테지만 나로서는 애정 어린 훈육이었다. 중3은 진학을 앞둔 시기이기도 한 만큼 아이들은 학습과 성적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이들이 중3 생활을 잘 설계하고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도록 돕기 위해서 빠르게 상담 일정을 잡고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만나며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3월이 가고 4월을 맞았다. 어느 정도 아이들 파악이 되었고 아이들끼리도 서로 알아가며 나름 적응해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름의 성장통 속에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보다 전문적이고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도 보였다. 그래서 수시로 학부모 상담을 진행했다. 자잘한 사안과 교사로서 관찰한 내용을 안내하면서 가정에서는 어떤지를 묻고 교사의 의견을 조심스레 전달했다. 부모님께서 학교에 요청하시는 내용도 함께 물었다. 부모님께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상담에 응해주셨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5월이 되면서 현장체험학습도 가고 체육대회도 했다. 반티를 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양보하고 조율하면서, 교실을 벗어나 때론 계주 대표로, 피구 선수로, 피켓 만들기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기꺼이 감당하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이렇게 아이들은 친구의 장점을 칭찬해 주고 때론 격려하면서 점차 '우리 반'이 되어갔다. 하지만 '우리 반'에 끼지 않고 여전히 겉도는 아이도 있었다. 4월에 학부모 상담을 했었던 바로 그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도 무거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아무리 상담하고 학부모님과 정보를 공유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아이가 두 아이, 세 아이로 점점 늘더니 6월이 가고 7월이 되면서는 7명으로 늘어났다. 그중에는 지도가 필요한 상황에서 교사가 만류해도 감정 제어가 안 되고 욕을 하거나 책상을 밀치는 등의 폭력성을 보이는 학생도 있었고,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해하는 학생도 있었으며, 다양한 이유로 학교에 오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고3이라면 모를까, 한창 내신 성적을 올려야 하는 비평준화지역의 중3 1학기 교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우리 반에 수업 들어오시는 한 선생님께서는 교직생활 25년 중 역대급으로 힘든 아이들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 정도로 이 아이들이 유별난가 싶다가도, 그 아이들이 결국은 담임의 성적표인 것 같아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학기말이 되면서 3월의 의욕 충만했던 나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동료 교사의 말 한마디에 이유 없이 눈물을 짓게 되는 날들이 있었다. 강한 무력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런 상황에서 맞은 방학이었다. 4주라는 시간이 유독 짧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렇게 도피하듯 맞이한 방학을 채 실감할 겨를도 없이 방학 다음 날도 아침부터 한 명의 학생에게 전화가 걸려오더니 머잖아 학생부선생님의 연락을 시작으로 학생 상담과 학부모 상담이 이어졌다.
아! 방학이어도 '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구나.
춘향이가 그네를 타던 날은 5월 단옷날. 한창 봄이기에 '수양버들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나비'가 날고 '꾀꼬리'가 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아니, 오히려 꽃피고 새 우는 봄날의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춘향이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떠나려 한다.
나 역시 방학이 나를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주기를 바랐다.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나에게 무력감만 안겨준 아이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그저 고요하게 나를 숨 쉬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춘향이에게 '그네'는 하늘로 가기 위한 기회인 동시에 올라간 만큼 내려올 수밖에 없는 한계였다. 내게도 '방학'은 잠시 '교사'라는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결국은 학교로 돌아갈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교사'인 이상 이 진자운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슬슬 교직에서 떠나야 할 때가 오는 것인가 싶다가 문득, 춘향이가 멀어지려고 했던 '수양버들나무', '나비', '꾀꼬리'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양버들나무가 다소곳이 흔들리고 나비가 날고 꾀꼬리가 우는 것은 춘향이 때문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실패한 것은 '교사'의 역할이 아니라 학생과의 거리 두기였을 뿐이다. 아니, 교사의 역할을 넘어 친구, 부모, 때론 상담사의 역할까지 욕심내었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 반 학생을 위한 최선이라 착각하면서.
사람은 서로 기대어 산다. 아무도 완벽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약점을 상대방의 강점으로 보완해 가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바로 성장이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이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면서도 정작 우리 반 아이들에 대해서는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고 끙끙거리고 있었구나.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벌써 1주일 후면 개학이다.
방학 동안 제대로 쉬지도, 그렇다고 새 학기를 준비하며 일을 하지도 않은 채 이곳저곳 병원만 기웃거리다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은 약해진 몸뚱이만 확인한 나는 여전히 2학기가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교사로서 감당해야 할 일 이상을 해내기 위해 끙끙거리지 않으려 한다. 우리 반 학생은 담임인 나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도, 다른 교과 선생님도, 상담사 선생님도 필요하다.
생각해 보면 지난 1학기 동안 학년 부장님을 비롯해 옆반 선생님, 위클래스 선생님, 학생부 선생님, 교감 선생님까지 여러모로 애를 써주셨다.
아이의 반응이 내 예상과 다르다고 해서 내 탓인 것도 아니다. 아이에게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도 있고, 그저 아이가 자라는 성장의 속도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내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네에서 내려온 춘향이의 마음도 가벼웠을까? 적어도 높은 곳에서 바라본 수양버드나무와 나비의 모습은 달랐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