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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Sep 02. 2023

가을이 오기 전 정리

여름의 막바지. 서둘러 올해 봄과 여름을 되짚어보자면 난생처음 남 앞에서 처절하게 울어봤던 봄이었고 한꺼번에 많은 걸 상실해버린 여름이었다. 유독 길게 불안했고 유난스러웠으며 잇따라 자주 슬퍼져 얼굴을 가렸다.


반드시 일어날 일들은 일어나는 법이란다. 마이너스 봄을 보내고서 필히 플러스 여름을 맞이하겠단 다짐은 뭉게구름처럼 속절없이 흩어져 버렸다. 매몰차게 그어진 작대기는 세로 없이 황량한 가로였다.


정성스레 사랑하지 못한 것들을 놓쳐 후회막심해 봤자 이미 떠난 일이니 자신의 과오에 관대하지 않으려 오늘날의 내 낯빛을 결코 잊지 않을 작정이다.


*

“절 싫어하실 줄 알았어요.”

“널 왜 싫어해. 걔네가 널 싫어해도 난 너 좋아.”

지체 없이 되돌아온 답변에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단언컨대 날 미워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쪼그려앉아 눈높이를 맞춘 상태로 멍하니 넋 놓았다. 일순간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도 같았으나 가까스로 잘 참아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도 울지 않은 스스로가 여러모로 의아한 참이었다. 햇살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서 빛을 보았다. 까만색 카디건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


다소 굼뜬 모양새가 답답함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겠다. 서글펐다. 원망스러운 점은 일절 없어 더더욱 서글펐다.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을 수도 있다. 새로이 깨달은 면이 있었다. 배웠다고 하기에 적당했다. 다시금 술집이 즐비한 거리를 걷고 담배를 태우는 친구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가히 그 안에서 배운 게 있다 생각했다.


“신복관 가기로 한 거 못 갔네.”

“사드릴게요. 이제 백수니까 제가 올게요. 불러주세요.”

“네가 먼저 연락해. 꼭 사주는 거다.”

어수선한 속내가 한결 차분해졌다. 잃은 만큼 얻은 게 있을까, 감상적인 상념에 사로잡혔다.


*

누군가를 궁금해하지 않는 이상 날 굳이 알려주려 들지 않을 수 있단 점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나에 관해 토해냈던 적도 있고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에 매료되어 술술 불어버렸던 적도 있다. 언젠가는 날 아는 사람들이 슬프다는 표현을 종종 하곤 하였으나 현재에 와서는 날 아는 사람이 되려 날 아프게 할 수 있음을 명확히 인지해버린 시점이다.


난 앞으로 점점 적적해질 예정이다. 트라우마 비슷한 작용은 나로 하여금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도록 보챌 거다. 혹은 지극히도 극에 달한 회피 성향이 공포를 실감한 것일 수도 있겠다만. 한때 열렬히도 사랑했던 이가 본인에 대해 궁금해하지 말라던 말의 요지를 이제서야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을 듯하다.


적잖이 외람된 바람이나, 난 나란 사람이 미궁 속에 잠식되기를 원해본다.


*

사람이 사람을 등지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체감했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거나 아예 없애버리고서 남들 눈을 피해 동굴로 숨고 싶다. 사실상 도피처는 도처에 널려있을 수도 있겠다만 이마저도 용기 없어 눈알만 굴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을 선호하지 않아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더라도 버스를 고집하는 편인데 요새는 지하철에 몸을 맡겨야 하는 날이 허다하다. 사방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이토록 두렵기 그지없다.


스물네 살이었나. 줄기차게 서울에 놀러 가느라 타던, 그럴 때마다 작은 창밖으로 내다보는 세상이 정겨워 잔뜩 신이 나던 지하철이 싫어졌던 해가. 오늘의 귀갓길, 눈시울이 붉게 물든다. 당장이라도 언덕 위로 뛰어오르고픈 심정이다. 얼굴이 벌게질 지경으로 핏대 세워 소리라도 지른다면 한결 낫겠다.


그 해 찬바람이 불던 무렵 멀어졌던 애에게, 네가 좋아하던 작가 신간이 나왔더라고 연락을 하고픈 날이 흔했다.


*

극복이란 건 매 순간 찾아오는 아량 넓은 단골손님 같은 게 아녔다. 전 세계 모래성을 다 뒤져도 발견하지 못할 보물보다 더한 거였다.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만 내 마음은 이미 바탕부터 그릇된 바람에 철저히 망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일어난 일의 형편은 온전히 내 탓이었다. 난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고 한들 애송이의 발악에 불과했다.


공허해진 눈으로 한참을 거닐었다. 또다시 위험천만한 골목을 걷고 밤보다 낮에 더 졸음을 느낀다. 겨우겨우 지워낸 얼굴들은 도로 수면 위를 치고 올라와 머릿속을 난장판으로 뒤엎어놓는다.


그으래애.


애초에 똑바로 살았더라면 이런 식의 꼴을 당면하게 되지 않았을 터였으나 이토록 불안하단 건 본인에게 떳떳하지 못하단 증명뿐이 되지 않는다. 치유하지 않아야 아로새겨 정신 차리고 살아갈 수 있으려나?


애꿎은 돌멩이를 신발 앞코로 연신 걷어찼다. 흙이 묻어 잔뜩 더러워졌다.


*

집에 오자마자 변기를 부여잡고서 뒤틀린 속을 한바탕 게워냈다. 근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 약 저 약, 되는대로 주워 먹다 보니 매사 몽롱한 정신으로 임했다.


“아 미안.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 서운했겠네.”

어제 일도 잘 기억이 나지를 않아 메모를 하는 습관을 익히는 중인데 그마저도 귀찮아 미루게 된다. 신물이 올라와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을 세면대에 물을 틀고서 담가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모든 게 순차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잘 될 거란 달콤한 속삭임에 깜빡 속아 잠들고 싶었다. 꿈속은 난장판이고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새벽은 더 이상 지겨웠다. 본인 생각을 말하는 일에 애를 먹었다. 상대가 조금만 격앙된 어투로 물어올 때면 말문이 턱 막혀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요즘 문자가 옛날이랑 다른 느낌이네. 엄청 활기찼는데. 그래도 고생 많았어. 나도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일어나려고 움직이고 있어. 서로 화이팅 하자.]

나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채주는 누군가가 있단 사실이 약간은 낯설게 와닿았다. 나쁘지 않았다.


*

내가 뱉는 미안해란 말은 가치를 잃어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진심이라 한들 상대는 함부로 남발한다 여길 수 있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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