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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Dec 22. 2023

사계절을 보내며 난 어떤 마음이 되었나

한 해의 끄트머리에 왔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감상에 젖어있기엔 꽤 아까운 시간이란 판단이 선다. 더 이상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학창 시절이 전부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요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영락없이 퍼석하다. 실내에 오래 내버려 두어 수분이 쫙 빠진 파운드케이크 같다.


예전엔 대단한 사람 따라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래야 그 사람 발치라도 되어 몇 달마다 오는 연락이 끊길 거란 불안감 없이 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대단한 사람이 대단하지 않다.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제 할 일을 하고 꼭 해야 할 일과 더불어 하고픈 일을 함께 진행하며 이뤄나가는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 묵묵하게 일궈온 길. 도착지를 알 수 없을지언정 만들어낸 거리가 값지지 않을 수 없다.


불과 몇 달 전엔 사람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했었다. 하루는 사람을 두려워하느라 잠 못 이뤘고 하루는 사람을 빨리 떨쳐내고자 일찍이 잠에 들었다. 꿈속에선 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하지 못해 울었다. 도망을 기반으로 시나리오가 짜였다.


새로운 직장에 출근했다. 이 공간 안엔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낯선 사람들뿐이다. 이전 같았으면 바짝 긴장부터 했을 터였다. 그러면서도 행동으로는 먼저 말을 붙이고 살갑게 굴며 친해지고자 애썼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다 친해져야 좋을 줄 알았다. 누군가 왜 그러냐 물으면 그냥 친해지면 좋잖아, 싱거운 대답을 줄곧 해왔다. 명확한 이유도 아니면서 그냥 그렇게 굴었단 거였다. 친해지면 좋으니까. 회사에 신입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땐 내가 신입인 시절 모든 게 캄캄하고 낯설었기에 누군가 역시 그럴 거라 짐작하여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괜한 오지랖이었단 사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올해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들도 겪었다. 다 지나갈 거란 말이 무책임하게 들렸던 시기가 있었다. 괜찮아질 기미 없어 위로를 등졌다. 봄에는 친애하는 이들을 떠나보냈고 여름엔 두루두루 상실했다. 가을엔 내가 떠나갔다. 전부라 여겼던 것들을 몽땅 빼앗겨 너덜너덜했다가 제 잘못을 반성하며 정신없이 달아나다 보니 비로소 겨울에 왔다. 빈손이 더러워졌다.


오늘 뉴스엔 최강 한파란 타이틀이 도배되어 있다. 롱패딩을 꺼내 입고 핫팩을 주머니에 넣은 채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서 잰걸음을 옮긴다. 크게 기복이 없다. 커다란 기쁨도 커다란 슬픔도 없이 잔잔하다. 짐작건대 극도의 불안을 건너온 덕분이었다. 연예인 홍진경이 말하기를 행복이란 자려고 누웠을 때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이라 했다. 지금의 나는 잠들기 전 다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종교라 할 건 없는데 신의 존재는 믿는다. 속으로 한 대여섯 가지 소원 같은 걸 말하고서 주기도문을 외우고 잠든다. 주기도문은 학생 때 기독교 재단인 사립 학교를 다니며 외웠다.


최근엔 좋은 일도 했다. 난생처음 한 공연으로 모은 입장료를 기부했다. 솔직히 혼자였더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일이었다.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요 며칠 사이 제법 입꼬리를 올릴 만한 소식들이 들어온다. 난 여태 행복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조만간 더 큰 불행이 찾아올듯하여 최대한 무표정하려 한다. 동요하지 않으려 한다. 슬프지 않을수록 씁쓸하다. 별 꼴이다.


밥도 잘 먹고 씩씩하게 지낸다. 살도 쪘다. 포동 포동 해진 볼따구를 만지작거린다. 정처 없이 떠돌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가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짓도 위험한 술집 거리를 거닐지도 않는다. 지인을 만나 웃고 떠들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낸다. 그럴싸한 삶이다. 이른 새벽. 괴롭게 만들던 얼굴들이 나와 울상이 되어버린 채 꿈에서 깨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하다.


새해엔 누구한테 메시지를 돌려야 할지 고민이다. 그전에 맞이하게 될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다. 영원할 수 없는 시간과 시들어버린 감동 속에서 난 현실을 알아버렸고 그게 날 놓을 수 있는 길이 되어버렸다. 저마다 가야 할 길에서 방황하던 날, 잡아주던 손이 차갑게 느껴질 적이 있었다. 다음 해에는 잃어버린 걸 도로 돌려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상실한 계절을 다시금 새로이 채워나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상처를 받을 수 없고 서운할 수 없다. 마음 같지 않은 날들을 묵묵히 수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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