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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Mar 25. 2024

무엇도 기억하지 않으려는 사람

이전의 난 나와 대면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타고난 예민한 기질이 한몫했던 거 같다.) 그래서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흘렸던 것들을 기억해 깜짝 선물을 해주기도 하고 누군가가 넌지시 건넨 다정을 보답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내게 ‘이랬잖아’하면 ‘아니야 그때 이랬어’ 정정하기도 했다. 하루가 끝나면 누군가와 있었던 일을, 누군가한테 들었던 말을 기록해두는 습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 같다. 평소 그러한 습관이 몸에 배어 나도 모르는 사이 기억하고자 귀를 쫑긋 세웠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간에 그로 인해 좋은 점도 있었다만 나쁜 점도 있었다. 기억을 잘하는 만큼 상처도 오래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서 정확히 기억해 몇 번이고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감동도 쉽게 잘 받는 사람이었고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좋지 않았던 거 같다.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며 ‘고맙단’말을 여러 번 했으나 작은 일에도 쉬이 울며 ’내 탓이야’ 혹은 ‘내가 무엇을 잘못하진 않았을까’ 자책했다. 더불어 남이 툭 던진 돌에 무심코 맞아 잘 죽으려 했다.


매일이 힘겨웠고 기억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뭐든 잘 잊는 사람이 부러웠다.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에 치중해서 그랬던 듯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난 여러 커다란 사건들을 지나쳐오며 ‘무엇도 기억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가능한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이미 머릿속에 새겨져버린 일들은 아직도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힌다만 근래에 보내는 소소한 일상들마저 지워버리려 한다. 때문에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 오늘 하루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를 되풀이하지 않고 누군가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는다. 멍한 상태로 무기력하게 누워있다.


사람들과 헤어지면 잔뜩 내려간 입꼬리로 감추고 있던 슬픔을 꺼내 껴안았다. 그저 울지 않으려는 상태로 울 힘도 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어떠한 것에도 재미를 모르겠고 이상의 큰 슬픔이 있을지 모르겠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에는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따위의 시답잖은 상상 같은 거나했다. 이미 흉이 되어버린 일들이 떠오르는 걸 막기 위해 급급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을 유지해야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피했다. 기억하지 않았고 기록하지 않아야 했다. 앞으로 일어날 더 좋은 일들로 기억을 채우면 되지 않냐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런 걸로 될 게 아녔다. 자연스레 기억력이 나빠지는 듯했다. 아니면 내가 기억하기를 차단하고 있는 듯했다. 사정을 아는 이들은 나를 위로했다. 잠시뿐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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