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5일째. 오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오늘 우리의 행선지는 “친퀘토리” (Chinque Torri - 이탈리아어로 다섯 개의 탑이라는 의미)
친퀘토리는 원래 3번째, 마지막 캠핑장과 거리가 더 가까워 여행 말미에 방문할까 했었는데, 케이블카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서머패스가 마침 오늘까지 유효하고, 게다가 날씨까지 보장해 주니 캠핑장에서는 거리가 꽤 있지만 오늘 친퀘토리를 방문하기로 했다.
친퀘토리는 아무래도 거리가 좀 있다 보니 우리는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거리도 거리지만 대중교통 이용 시 거의 4시간이 걸리는 걸로 나온다) 거리는 86 km정도인데 구글 맵으로 도착시간을 확인하니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가는 길이 꽤 구불구불한 고갯길이라는 게 짐작이 간다.
9시 30분쯤 캠핑장을 출발했다. 차 연료를 보니 약 180 km 정도 주행 가능하다고 나온다. 연비가 일정하다는 가정하에 우리가 갈 곳이 86 km 떨어진 곳이니 이론상으로는 도착지까지 가는데 연료는 충분했다. 마침 캠핑장을 나서 머지않은 곳에 주유소가 있어 친구가 혹시 여기서 주유를 할까 물어봤는데 나는 “일단 친퀘토리까지 가는 것까지 괜찮지 않을까”했고, 친구도 뭐 가는 길이나 혹은 돌아오는 길에 주유를 해다 되겠다 싶어 그냥 지나쳤다.
지난 이틀 동안 들러서 꽤 눈에 익은 오르티세이와 산타 크리스티나를 지나니 구불구불 고갯길이 시작되었다.
돌로미티는 트레킹을 즐기는 등산객뿐만 아니라 산악자전거와 모터 사이클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곳인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 구불구불한 고갯길 때문이다. 이런 길들을 “파쏘” (이탈리아어로 고개 또는 패스를 의미)라고 부르는데 수많은 헤어핀(hairpin) 커브와 오르막, 내리막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라이딩의 재미를 극대할 뿐만 아니라 눈앞으로 펼쳐지는 웅장한 봉우리와 기암괴석이 운전 내내 시야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파쏘로는 “파쏘 셀라(Passo Sella)”, “파쏘 포르도 이(Passo Pordoi)”, “파쏘 가르데나(Passo Gardena)”, 파쏘 캄폴롱고(Passo Campolongo)”, 그리고 파쏘 팔차례고 (Passo Falzarego) 등이 있는데, 산타 크리스티나를 지나고 얼마 있지 않아 이 중 “파쏘 가르데나”가 펼쳐졌다. 헤어핀 도로가 꽤나 스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압도적인 것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 깎아지는 절벽과 봉우리들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구불구불 고갯길을 오르다 보니 연료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떨어졌다. 파쏘 가르데 나를 다 지나갈 때쯤 저 연료 경고등이 켜졌다. 친구가 이제 주유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해 나는 구글 맵으로 근처 주유소와 연료비를 체크했다. 파쏘 가르데 나를 지나면 코르바나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 주유소보다 조금 더 가니 더 저렴한 주유소가 있어 나는 친구에게 여기 말고 조금 더 가면 저렴한 주유소가 나오니 거기서 주유를 하자고 했다. 아, 그런데 내가 구글맵에서 본 주유소는 우리가 가는 길이 아니었다. 구글 지도를 잘못 본 것이다! (나는 코르바나 마을에서 직진으로 생각하고 주유소를 찾았는데, 우리는 코르바나 마을에서 우회전을 해야 했다.) 게다가 우리가 가는 길에는 친퀘토리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주유소가 하나도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 공사 때문에 길이 막힌다. 친퀘토리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라 연료 떨어지는 소리가 덜컹덜컹하고 들린다. 친구는 정체구간에서는 엔진까지 끄며 최대한 연료를 아끼려 했다. 도착지 까지는 약 20 km정도 남았는데 남은 연료로는 약 50 km 정도 갈 수 있다고 나온다. 일단 친퀘토리까지 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다행히 친퀘토리까지 도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일단은 연료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친퀘토리를 즐기기로 했다. 도착 시간은 12시 정도였는데, 이미 주차장은 만차다. (참고로 주차장은 무료다.) 주차장 밖까지 조금의 공간이라도 있으면 무질서하게 주차가 되어 있다. 우리도 대세를 따랐다. (질서는 없지만 왠지 사람 사는데 어느 정도는 필요한 ‘유도리’가 있어 보여 우리는 괜스레 정감이 갔다. 스위스 알프스의 완벽함이 주는 숨 막힘에 비하면 훨씬 정감 있다고 해야 할까..)
리프트를 타고 친퀘토리로 올라가니 여러 개의 “탑”같아 보이는 바위가 우리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웅장하진 않아 조금 실망했지만, 출발 전날 본 유튜브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도 될 만큼 쉬운” 길을 따라 트레킹을 하다 보면 더욱 선명한 다섯 개의 탑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 길을 나섰다. 같은 유튜브 채널은 아니었지만 친구가 확인한 블로그에 의하면 누볼라오 산장 (Nuvolau Rifugio)에서 가장 멋진 뷰를 볼 수 있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정보를 적당히 섞어 이해한 후 저 멀리 보이는 누볼라오 산장을 향해 트레킹을 시작했다.
동쪽 돌로미티는 서쪽에 비해 돌산이 많다. 그래서 트레킹길도 서쪽에 비해 조금 더 까다로운데 딱 친퀘토리가 그랬다. 돌길이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바위와 절벽이 주는 압도감에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는 듯했다. (암벽 등반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일 듯. 실제로 암벽 등반으로 오르는 사람도 꽤 있다.) 산장을 향해 돌길을 한 30분 정도 걸으니 드디어 목적지 도착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가 예상했던 산장뷰가 아니다. 산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우리는 이 산장은 우리가 가려했던 “누볼라오 산장”이 아니라 “아베라오 산장 (Averau Rifugio)”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 그럼 우리가 가려는 누볼라오 산장은 어디 있지 하고 둘러보는데, 깎아지는 절벽 돌산 끝에 조그 맡게 산장하나 가 더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우리가 가려했던 누볼라오 산장이었다.
누볼라오 산장까지 가는 길은 훨씬 더 험난해 보였다. 사실 이게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험난함의 정도가 조금 달라 보였는데 아베라오 산장에서 보는 길은 낭떠러지 절벽 돌산 외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내려갈 수도 없고 마음이 요동쳤는데 친구가 성큼성큼 앞서간다. 친구를 따라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 데 어느 정도 험한 길을 지나자 해볼 만했다. 그러다 둘러보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도 열심히 올라간다. 힘을 내자! 이렇게 한 30-40분을 더 오르니 드디어 우리가 오고자 했던 누볼라오 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은 말 그대로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었다. 유명세만큼이나 사람이 많아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산장에서의 여유로운 커피는 포기했야 했다. 다행히 산장 뒤쪽으로 가니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커피를 마실 공간이 있어 그곳에 자리를 폈다. 멀리 친퀘토리의 탑이 선명하게 보인다. 아직도 정확히 다섯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원 중간에 떡 하고 탑 여러 개가 삐죽 솟아난 것이 확연하다. 우리는 이 “유명한 탑”을 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한잔했다. 등산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묘한 성취감에 피로가 싹 가셨다.
우리는 도대체 그 유튜버는 어떻게 이 길을 유모차로도 올 수 있다고 했을까 의문을 가지던 차에, 친퀘토리 밑으로 돌아서 가는 트레킹 루트를 발견했다. 유모차를 끌고 갈 만큼 평평하고 경사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근데 그 정보를 잘못 이해한 덕분(?)에 망설임 없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 같아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이렇게 누볼라오 산장에서 성취감을 만끽한 뒤 리프트를 타고 내려왔다.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라가 주오이 산장 (Lagazuoi rifugio)이다.
라가 주오이 산장은 이탈리아 돌로미티 산맥의 라가 주오이 산 정산에 위치한 산장으로 해발 2,752m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넓은 산장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10분 정도면 산장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물론 트레킹으로 오를 수도 있다. 우리는 서머패스를 이용해 케이블카로 올랐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정거장에서 올려 본 정상은 압도적으로 높아, 위에서의 경관이 어느 정도 예상은 되었지만, 도착했을 때의 뷰는 정말 상상초월이었다. 감탄사의 연발이다. 탁 트인 뷰는 친퀘토리를 포함한 돌로미티의 여러 봉우리들을 360도로 보여준다.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돌로미티 봉우리들을 앞에 둔 산장의 야외 좌석은 여유로웠다. 딱 우리가 원했던 산장의 뷰와 여유로움이었다. 우리는 커피 2잔과 돌로미티 지역의 유명한 디저트인 사과파이(Apple Strudel)를 주문했다. 아,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라가 주오이 산장에는 숙박객을 위한 객실이 있다고 하는데 최소 1년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해가 된다. 이런 뷰를 가진 산장에서 아침을 맞이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이건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 산장에는 핀란드식 사우나가 있다고 한다. (오호!)
우리는 케이블카 막차 시간인 5시에 맞추어 내려왔다. 참, 라가 주오이 케이블카 정거장에는 유료 주차장이 있는데, 꼭 유료주차장에 세우지 않고 주변 공터에 세워도 무난하다. (유도리의 나라 이탈리아! 맘마미아! ) 실제로 더 많은 사람이 근처 공터에 주차를 해 우리도 그렇게 했다.
자 이제 슬슬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주유! 남은 연료로 갈 수 있는 거리는 50 km 정도. 가장 가까운 주유소는 코르티나 담페초에 있는 주유소로 약 16 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런데 코르티나 담페초는 우리 숙소의 반대편이라 주유를 하고 다시 16 km를 돌아와야 한다. 다음으로 가까운 주유소는 약 30 km 떨어져 있다. 이론상으로는 문제없이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가는 길은 거의 내리막 길이니 연료 효율성은 훨씬 좋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숙소 가는 길에 가장 가까운 주유소 (Q8)에서 주유를 하기로 했다. 생각했던 대로 돌아오는 길은 내리막이 많아 연료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안심이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가 묻는다. “혹시 주유소가 문을 일찍 닫으면 어떡하지?” 나는 “주유소는 보통 24시간 아닌가” 했는데. 아! 우리는 유럽, 그것도 시골에 있다. 혹시 몰라 구글로 찾아보니 아뿔싸! 우리가 가려는 가장 가까운 주유소는 6시에 문을 닫는다. 시간이 빠듯하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다. 웨이즈의 예측대로라면 우리는 5시 40분 정도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한치의 돌발상황도 없어야 한다. 아침에 만났던 공사를 제외하고 큰 돌발 상황은 없었다. 우리는 다행히 주유소가 문을 닫기 전 도착해 주유를 하고 여유롭게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늘 들르던 카스텔로또 마을의 데스파 슈퍼마켓에서 삼겹살도 샀다. 오늘 저녁은 삼겹살이다. 유난히도 삼겹살이 맛있었다.
** 참고로 이 라가 주오이 산은 세계 1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의 격전지였던 곳으로, 산장 주변에는 당시의 참호와 터널 등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어 야외 박물관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산장에서 머지않은 곳에 박물관이 있는데 오후 4시에 문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