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 여행을 시작한 이후 위밍업과 답사를 위한 첫날을 제외하고 가장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그동안 아침 일찍 나가 저녁에서야 들어오는 바쁜 일정으로 미뤄두었던 빨래도 하고, 우리 주변과 동선을 제외한 사이트 외에 가 보지 못했던 다른 사이트도 구경했다.
체크인 시 캠핑사이트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를 배포해 주어서 대충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생각은 했었지만, 전체 사이트를 모두 둘러보니 그 규모가 대단했다. 특히 우리 숲 속 텐트의 정 반대쪽 사이트는 그야말로 “청담동” 아니 “한남동”이었다. 캠핑카를 주차하고 그 옆에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넓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시야가 확 트여 있어 돌로미티 바위 봉우리가 한눈에 보이는 그야말로 “뷰” 맛집이었다. 거기에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프라이빗하게 식사도 하며 경치를 맛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역시나 비싼 건 다 이유가 있다. 이쪽 사이트는 샤워시설, 화장실 등이 있는 생활동과도 가깝다.
“한남동” 구경 후 생활동으로 돌아와 빨래도 돌리고 생활동 구석구석을 둘러봤는데, 시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개인별로 사용할 수 있는 샤워실은 물론, 강아지 전용 샤워실도 있다. 숲 속 텐트에는 작게나마 개수대가 있어 (물론 찬물만 나오지만) 설거지를 굳이 여기까지 가지고 올 필요가 없었지만, 당연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주방도 있고 식기세척기도 잘 구비되어 있다. 이렇게 시설을 둘러보던 차에 우리는 빨래방에 “냉동고”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일이 체크아웃인데 이런 꿀 정보를 지금에서야 얻다니! 그래도 하루가 더 남았으니 오늘이라도 시원한 맥주를 마셔보자!
이렇게 느긋한 아침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12시 30분쯤 오늘의 목적지인 “산타 막달레나 (St.Magdalena)" 마을로 향했다. 산타 막달레나의 마을 이름은 이곳에 있는 작은 교회 “산타 막달레나 교회(Chiesa di Santa Maddalena)”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아주 확실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교회는 14세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하니, 역사가 꽤나 깊은 곳인 듯하다.
세이저 알럼에서 산타 막달레나까지는 차로 45분 정도 걸린다. 산타 막달레나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꽤 잘 닦여진 2차선의 일반적인 산 길이다. 돌로미티는 사과로 유명한데, 길 옆으로 사과밭이 쭉 늘여져 있어 흡사 우리의 고향 마을 문경 산길을 운전하는 듯했다.
잘 닦여진 도로에서 마을 초입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을 초입에 주차장이 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 극 성수기에는 주차난을 좀 겪을 것 같았다. 다행히 우리가 도착했을 때 자리가 하나 나 있어 주차하는데 크게 힘들지 않았다. 주차는 유료인데 주차장 한편에 세워진 기계에 차번호를 입력하고 비용 (4유로)를 지불한 후 스티커가 나오면 그 스티커를 차 유리 앞에 놓아두면 되는데, 우리는 꽤나 고생을 했다. 기계가 고장인지 우리가 뭘 제대로 못했는지 계속 에러가 났다. 결국에 티켓 같은 게 나와서 이걸 갖다 놓으면 되는가 하고 다른 차에 올려놓은 티켓과 비교하니 달랐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단 차에 올려놓고 목적지로 향했다.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용하고 한산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답지 않았다. 우리는 최소 기념품 가게 라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마을 입구에 호텔/레스토랑이 전부다.
마을 입구에 있는 호텔을 오른쪽으로 두고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멀리서 산타 막달레나 교회가 보인다. 우리는 사진으로 봤을 때 마을이 평평한 평지일 거라 생각하고 부담 없이 왔는데, 역시 알프스의 마을은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멀리서 평지인 것처럼 보이는 길들이 어느 정도 경사가 있어 생각보다 꽤 힘들었다. (친퀘토리 누볼라오 산장 트레킹 길과 비교하면 걸음마 수준이긴 하지만.) 거기다 오늘은 날씨까지 구름 한 점 없이 쨍해 길을 오르는 내내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교회에 도착해서 한번 쭉 둘러본 후 뷰포인트까지 향했다. 교회에서 뷰포인트까지 가는데도 한 4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뷰포인트가 손에 닿을 듯한데, 보기와 다르게 꽤 멀었다.
뷰포인트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한그루 세워져 있고 그 밑으로 벤치가 하나 있다. 목가적이라는 말이 딱 이곳에서 나온 듯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주변에 넓은 풀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데, 곳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붙여져 있다. 이 풀들은 이곳에 사는 주민이 키우는 소들이 먹어야 하는 풀이라고 하니, 평소에는 이 넓디넓은 평원에 소들이 풀을 뜯고 있겠다 싶어 그 모습을 상상하니 “목가 牧歌 “라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됐다.
뷰포인트에 도착하니 이미 벤치는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혼자온 젊은 여자였는데 연신 SNS를 보고 있다. 관광객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중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이 있었는데, 길가에서 사진 찍기 삼매경이다. 우리는 일단 벤치 뒤 평평한 곳에 돗자리를 깔고 아침에 싼 샌드위치로 점심을 했다. 샌드위치를 다 먹을 때까지 젊은 여성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연신 시계를 보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보다 먼저 도착한 중국인 커플을 보니 바리바리 도시락을 싸 온 듯했는데, 사진 찍느라 하나 남은 평평한 자리를 우리에게 뺏긴 후 (?) 이리저리 둘러보다 다시 길을 내려간다. 저 벤치 자리가 나면 좋으련만 그래도 괜찮다, 이런 멋진 뷰에 자리가 무슨 상관이랴! 조금 있으니 중국인 여자 커플 두 명이 와 우리 앞쪽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어디선가 고양이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뭐 먹을 것이 없나 이리저리 살피는데 우리는 마침 점심으로 싸 온 샌드위치를 다 먹은 후라 별로 흥미가 없는지, 냄새를 킁킁 맡더니 방금 도착한 중국인 여자 커플에게 간다. 마침 그녀들은 막 먹다 남은 샌드위치가 있어 그 조각을 내어주니 올타구나 하고 그 옆에 계속 어슬렁 거린다. 우리는 먹을 거라고는 헤이즐럿이 다여서 그거라고 하나 던져주었는데, 헤이즐럿은 고양이 취향이 아닌가 보다. 슬쩍 냄새를 맡아보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간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벤치에 앉은 여자는 시간이 다 됐는지 쉬크하게 스웨터를 등에 둘러 맨 후 자전거를 타고 휑하고 내려간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관광객은 아니고 여기 어디에선가 사는 로컬이 아닌가 싶다. 남자 친구이라도 기다린 건가. 그럼 남자 친구에게 바람맞은 건가. 갑자기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참, 돌아가는 길에 자전거를 타고 다시 올라가는 그녀를 마주쳤다.)
그렇게 빈 벤치를 차지하고 멀리 보이는 오들레 산군과 산타 막달레나 교회를 배경으로 이리저리 사진도 찍고 다시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은 늘 그렇듯 너무나 쉬웠다. 참, 산타 막달레나 마을이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뷰포인트에서 보는 환상적인 자연경관 때문이다. 돌로미티의 웅장한 봉우리인 오들레 산군(Odle Mountains)을 배경으로, 푸른 초원 위에 자리 잡은 산타 막달레나 교회와 전통적인 알프스 가옥들이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주차장에 도착했을쯤 휴대전화를 보니 주차비로 결제했던 4유로가 취소됐다는 문자가 왔다. 뭔가 잘못했나 보다. 의도치 않게 공짜 주차를 하게 된 셈이다. “유도리”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는 이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오늘의 주요 일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로 부탄가스를 사는 것이다! 캠핑의 필수품 중 하나는 바로 부탄가스인데 지난 5일 동안 무려 3개의 부탄가스를 사용했다. 이제 남은 부탄가스는 하나, 남은 일정은 10일. 우리는 당연히 캠핑장에 부탄가스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길쭉한 부탄가스는 없다. 지난 며칠 동안 슈퍼를 갈 때마다 부탄가스 여부를 살펴봤는데, 없다. 이제 부탄가스를 살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어디서 이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에 그동안 우리 여행에서 여행정보 및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한 구글 제미니 (우리는 구제민이라고 부른다.) 생각이 났다. 우리 똑똑한 구제민이에게 물오보니 3곳을 추천해 줬다. 그중 두 곳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거리가 꽤 멀었고 한 곳은 오르티세이 마을 입구에 있는 철물점이다. 우리는 지프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철물점으로 향했다.
철물점을 오르티세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여러 큰 상업 시설이 모아져 있는 곳에 있었다. 주차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와인잔이나 그릇 등도 팔고 있어 철물점이라기보다 잡화점 같았다. 우리는 일단 부탄가스가 있을 만한 곳으로 가 진열대를 일일이 스켄하며 부탄가스를 찾았다. 그렇게 1-2층을 다 둘러봤는데도 없다. 철물점 직원에게 가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이런 게 있느냐 물었다. 잘생기고 친절한 직원은 한눈에 알아보고 몇 개가 필요한지 묻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용한 부탄가스 개수와 남은 일정을 고려해 5개 (친퀘 - 친퀘토리 덕분에 알게 된 이탈리아어)를 주문했다. 아 뿌듯하다!
자, 오늘의 마지막 일정. 저녁 장보기! 우리는 늘 가는 카스텔로또 데스파 슈퍼로 향했다. (이 슈퍼는 캠핑장 가는 길에 있기도 하지만 주차장이 아주 널찍하고 편리할 뿐만 아니라 데스파 슈퍼에서 10유로 이상 구매하면 1시간이 무료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나 저녁 전에 시원한 맥주로 아패로도 할 겸 식전에 먹을만한 안주 거리로 이탈리안 햄, 프로슈토(Prosciutto)와 살라미(Salame)를 먹어보기로 했다. 햄 코너에 보니 프로슈토와 살라미가 반반 섞여 있는 제품이 있었는데, 포장지에 사슴이 그려져 있고 체르보(Cervo)라고 쓰여있다. 이건 사슴고기인가… 시도해 보기로 했다.
캠핑장에 돌아와 시원한 맥주 (아침에 얼려둔 얼음을 찾아와 보냉백에 맥주와 함께 넣어두었다) 한 캔에 햄을 뜯었다. 와! 이 사슴 살라미 맛이 끝내줬다. 나와 친구 모두 살라미보다는 프로슈토가 취향인데, 프로슈토는 찬밥 신세였다. 사슴 고기라 냄새가 나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오히려 일반적인 돼지고기 살라미보다 덜 기름지고 담백한 맛이었다. 쇠고기 같은 질감에 야생동물 특유의 풍미가 더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알고 보니 돌로미티의 특산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슴 살라미 “살라미 디 체르보(Salame di Cervo)”라고 한다. 이렇게 우연히 돌로미티의 특산품을 먹어보다니!!! (체르보(Cervo)는 이탈리아어로 사슴 뜻함)
오늘도 멋진 하루였다. 지난 이틀만큼 쫄깃한 긴장감은 없었지만. 내일은 숲 속텐트 체크아웃 날이다. 아침 9시 체크아웃이라 우리는 저녁을 빨리 해결하고 아침 거리를 미리 준비한 후 세간 살이 짐을 미리 싸 두었다. 이 철저한 준비성이란! 내일 만나게 될 새로운 숙소와 새로운 마을이 기대된다!
* 참고: 돌로미티는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로부터 사냥 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사슴, 노루(카프리올로), 멧돼지(친기알레) 등 야생동물의 고기를 활용한 육가공품이 발달했는데, 그중 사슴 살라미는 독특한 풍미와 희소성으로 인해 이 지역의 특별한 특산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