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숲 속 텐트를 체크아웃하는 날이다.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늘 왜곡되어 있듯이, 첫 1-3일은 하루하루가 정말 길게 느껴지더니, 나머지 3일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길 것만 같던 6박 7일이 벌써 지났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제 여행도 중반으로 접어든다.
체크아웃 시간은 첫날 체크인 시 나눠준 캠핑 주요 시설에 대한 이용 설명서에 9시라 적혀 있는데 원래 10시 30분으로 되어 있던 것을 볼펜으로 죽 그어 지운뒤 9시로 정정한 것이었다. 10시 30분 체크아웃은 겨울철 이용하는 고객을 위한 것인가 갸우뚱했다. 보통 체크인이 3시 이후인데 그럼 6시간이 비는 것인데 데, 사용된 방 정리는 1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님 체크인 준비를 위해 방을 정리하는 직원이 한 명뿐이어서 숲 속 텐트를 비롯, 청소가 필요한 개별 숙소 등을 한꺼번에 청소하기 빠듯해서일까? 아무튼 나중에 이런 호스피탈리티 쪽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다.
숲 속 텐트라 텐트 대신 나무로 지어진 그럴싸한 곳에서 잠을 자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캠핑과 마찬가지이다. 친구가 저 멀리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 온 버너와 소꿉장난용 같은 코펠로 대부분의 식사를 직접 해결하다 보니 은근히 챙길 것이 많았다. 체크아웃 시간이 아침 일찍인 것을 감안해 우리는 전날 식사 후에 캠핑 용품을 미리 정리해 두었다.
그래도 아침에 이것저것 챙기고 짐을 싸고 나가려고 본 시간이 정확히 8시 55분이었다. 오늘도 쫄깃쫄깃한 긴장감! 이 체크 아웃 시간을 넘기면 사이트 하루 이용료가 자동으로 청구된다고 했는데 설마 이 몇 분 늦는 것으로 차지가 되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9시 정각에 체크아웃을 하고 다음 행선지인 카레 호수로 향했다.
참. 이탈리아에서는 묶은 숙소의 가격에 따라 1.5유로에서 5유로까지 관광세가 부과되는데, 우리는 각각 2.5유로씩, 6일 이렇게 총 30유로를 체크 아웃과 함께 계산했다.
카레짜 호수 (Lago di Carezza)는 돌로미티 동쪽에 위치한 두 번째 숙소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어 동선이 맞았다. 9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45분쯤 운전을 하니 도착했다. 카레자 호수로 가는 길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냥 터널이 좀 많았다 정도? GPS에 의하면 목적지로는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차창 너머 산길 아래로 호수가 반쯤 보이는 것이 아닌가? 지도를 보니 지도에 큰 호수가 그려져 있어 혹시 이곳이 카레자 호수가 아닐까 하고 보니 맞았다. 알고 보니 GPS에 등록한 목적지는 “카레짜 리프트”였다. 속도를 줄여 조금 더 가니 바로 왼쪽 편에 큰 주차장이 보여 우리는 주차를 하고 카레짜 호수로 향했다.
카레짜 호수는 '무지개 호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정처럼 맑은 물과 주변의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며, 빛의 각도에 따라 에메랄드, 파란색 등 다채로운 색으로 변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인스타그램에 소개된 이곳의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모습들인데, 터널을 통해 접한 실제 호수는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다. 호수에 물이 많이 빠져있어 규모가 반쯤은 줄어든 듯했다. 침엽수 뒤로 펼쳐진 돌산은 구름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 했는데, 다행히 구름이 걷힌 순간을 잘 잡아 인스타용 사진은 그럴듯하게 찍었다. 그렇게 찍고 다시 보니 정말 신비한 호수 카레자의 명성이 그대로 보이는 듯했다. 역시나 사람과 같이 자연도 사진빨이 특별히 잘 받는 곳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세체다나 알페디시우시 같은 곳은 사진으로 그 광활한 고원이 주는 깊이를 전달할 수 없었다)
아쉬운 김에 카레짜 호수 주변으로 난 트레킹 코스를 돌며 짧은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근처 다른 곳을 들를까 하다, 숙소에서 가까운 큰 마을인 카나제이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카느케이로 가는 길에 작은 마을들을 몇 개 지나쳤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가 앞으로 4박 5일 동안 머무를 캠핑 사이트가 있는 포자 디 파사(Fozza di Passa) 동네였다.
동쪽 동네를 지나치며 느낀 점은 서쪽에 비해 집들이 훨씬 더 클래식하고 올드하다는 것이었다. 건물들은 서쪽에 비해 더 낡아있었고 새로 지은 건물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서쪽의 주요 마을에서 느껴지던 럭셔리함이 모두 걷히고 소박하고 아담함만 남은 겉멋을 걷어낸 진정한 돌로미티의 삶을 보는 듯했다.
돌로미티의 서쪽이 제주도 중문 정도되는 곳이라면, 동쪽은 문경새재 정도 되는 곳이랄까? (친구의 비유인데 딱인 듯했다) 이 비유는 절대 문경새재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문경 출신인 우리에게 이 의미는 이 동네가 주는 감성이 더 정겹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는 이 올드하고 클래식한 그래서 약간은 촌스러워 보이는 감성이 딱 맘에 들었다.
이렇게 정겨운 마을을 몇 개 지나 카나제이(Canazei)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카나제이는 돌로미티 산맥의 셀라(Sella) 산군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주변의 주요 고개인 파쏘 셀라(Passo Sella)와 파쏘 포르도 이(Passo Pordoi)로 이동하기 편리하여 많은 여행자들이 거점으로 삼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바이커들이 꽤나 눈에 띄었다.
우리는 시내를 한번 쭉 둘러본 후 시내 중심에 자리 잡은 광장으로 갔다. 광장을 주변으로 버스 정류장, 쇼핑몰 등이 위치해 있는데, 모든 게 마을 크기만큼이나 아담하고 소박했다. 관광센터가 있어서 들러 한(!) 맺힌 지도들과 지역 문화 행사 등이 담긴 책자를 들고 나왔다. 딱히 할 것도 적당치 않고 문을 연 가게도 많지 않아 광장에서 서성거리다 우리는 점심 먹을 식당을 찾았다. (참고로, 돌로미티 동쪽 마을은 12시부터 오후 3시 혹은 4시까지 식당을 제외한 상점을 문을 닫는다. 돌로미티 서쪽지역에서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구글 맵을 켜고 근처 레스토랑의 평점을 보니 4점 (5점 만점)을 넘는 곳이 별로 없다. 관광지라 그런가. 별점에 박한 가 보다. 우리는 평점은 일단 차치하고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보기로 했다. 카나제이의 가장 큰 대로변에 두 개의 호텔이 서로 마주 보고 서있다. 두 호텔 모두 레스토랑이 1층에 있어 메뉴를 확인해 보니 대동소이했다. 어딜 갈까 하다 “돌로미티 카나제이 호텔” 레스토랑을 택했다. 이 레스토랑을 선택한 이유는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데, 아마도 이곳에 지역 특산 요리 (사슴 요리 등)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12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는데, 레스토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는지 조용하다. 호텔 안에도 들어가 보고, 야외 테라스에도 앉아 기다려도 아무 인기척이 없다. 그러다 12시가 조금 지나자 직원들이 영업을 시작했다. 문도 열지 않은 야외 테라스에 허락도 없이 앉아 있는 게 민망해 문 열기 전에 일어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야외 테라스 자리로 우리를 안내해 준다.
참, 직원 중에 아시아 (중국인 같다)인으로 보이는 남자 앳된 남자 직원이 우리를 안내했는데 관광객을 제외한 로컬로는 처음 본 아시아 인이라 갑자기 그의 스토리가 궁금해졌다. 호텔사장 아님 레스토랑 사장 아들인가. 아무튼 싹싹한 젊은 청년이었다.
우리는 특산음식 위주로 주문했는데, 빵 반죽에 베이컨, 햄, 치즈, 비트 등을 넣어서 만든 덤플링 (크뇌델 (Knöde 혹은 Canederli)과 사슴고기로 만든 라구 스파게티, 그리고 사슴고기 스튜를 주문했다. 덤플링은 치즈, 햄, 비트, 시금치 이렇게 4가지 맛이었는데 퍼실이 들어간 버터 소스와 함께 서브되었다. 식감은 약간 어묵 같았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사슴 라구 스파게티는 쇠고기나 송아지 고기 대신 사슴 고기를 이용해 소스를 만들었는데 사슴 특유의 진한 고기 향이 나 라고 스파게티의 맛을 배가 시켰다. 사슴 스튜는 사슴고기를 이용해 만든, 일종의 뵈프브르기뇽 같은 스튜 요리 었는데, 이 사슴 스튜와 함께 이 지역의 특산요리인 폴렌타 (Polenta) - 옥수수 가루를 끓여 만든 죽 - 와, 역시 이 지역이 특산품인 각종 버섯볶음이 함께 나왔는데, 폴렌타, 이 옥수수 죽 같은 건 우린 한 입 떼어먹고는 말았고 (뭐랄까 가난한 맛?), 이 버섯볶음이 일품이었다. 온갖 종류의 야생 버섯을 볶아 낸 음식인데 각양각색의 버섯향이 잘 어우러진 맛있다.
이렇게 돌로미티에서의 두 번째 외식을 마치고 우리는 캠핑장이 있는 포사 디 파사로 길을 나섰다. 카나제이를 오는 길가 공터에 시장이 선 것을 봤었는데, 그곳에 들러보기로 했다. 딱 시골 오일장 같은 정감 있는 분위기다. 아무래도 산악지역이다 보니 등산복과 각종 특산품이 주를 이뤘는데, 그 외에도 가방, 가죽제품, 장난감 같은 것도 판매한다. 맘에 드는 게 몇 개 있긴 했는데, 선뜻 손이 가진 않았다. 일단 이 마을에 4일은 있을 예정이니, 그동안 생각나면 하루 들르기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참고로 그 이후에 다시 시장에 가진 못했는데, 그때 바로 사지 않은 것이 내심 후회스러웠다. 여행하면서 맘에 드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사는 걸로!)
캠핑장에 도착하니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캠핑장은 친구가 확신하지 못했던 곳이었는데, 그만큼 외국인 관광객보다는 이탈리아 로컬 관광객이 많은 듯했다. 리셉션 앞에 차를 세워두고 체크인을 한 후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를 따라 우리가 4일 동안 머물 카라반으로 향했다. 우리 카라반은 리셉션 바로 앞쪽이었고,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는 생활동과도 아주 가까워 맘에 들었다. 카라반을 꽤 낡았는데,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할아버지는 짧은 영어와 손과 발짓을 이용해 카라반 사용법을 설명해 줬다. 첫 번째 캠핑장이 5성급 호텔이었다면 여긴 모텔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동쪽 돌로미티만큼이나 정겨웠다. 이곳만의 매력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우리의 카라반 첫 박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