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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02. 2020

#1  은밀한 제안

#1  은밀한 제안

- 제가 가지고 살아야 할 상처이자 풀어가야 할 화두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엔 좀 그래서 소설의 형식을 빌렸습니다.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는 오롯이 독자의 몫입니다. 감사합니다.


#1 은밀한 제안


    영숙은 내내 심란했다.  도대체 자신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했는지 불쾌하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께름칙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황당한 제안을 했던 안 득수는 평소 점잖기로 호평이 난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아주머니, 한 번 잘 생각해보소.

- 됐어요. 그런 망측한 말일랑은 하지도 마소.

- 그렇게만 생각지 마시랑께.

- 남사스럽게 어찌 그런 말을 다 한단말이오.

- 내 오죽하면 이러겄소. 내 좀 살려주는 셈 치고 허락해주소.  내 아들만 하나 낳아주면 가게 하나 번듯허게 차려줄랑께. 제발 부탁허요.

- 아들 아빠 들으면 큰일 날 소립니더.  대았으니 그만 가소.  벌써 몇 번 째요.


    아들을 낳아달라는 득수의 제안이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 상대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벌써 보름 째 걸핏하면 찾아와 매달린다.  평소 같으면 비짜루를 들고서라도 쫓아냈을텐데 그래도 손님이라 모질게 대하지 못했을 뿐인데.  하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영숙의 귀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오늘은 가게를 차려준다는 말까지 하니 순간 솔깃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본래 영숙은 주변이 부러워할 만큼 좋은 환경에서 부족함 모르고 자라온 터라 남편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궁핍해진 형편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창 커가는 아이들을 생각해 남편을 거의 내쫓다시피하고는 직접 가게에 나가 돈을 벌기 시작하였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치는 않아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차에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자기 가게를 마련하게 해준다는 말 한마디가 영숙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숙의 마음이 오늘따라 유독 흔들린 것은 가게 주인이 장사가 시원치 않다는 핑계로 며칠째 월급을 미루고 있어서다.  그놈의 돈만 아니라면...  남편이 돈이라도 잘 벌어왔으면...  아니 있는 돈 까먹지만 않았어도...  영숙은 사업에 실패한 남편만 생각하면 속이 상했다.


    다음 날 득수는 또 다시 영숙이 일하는 가게로 찾아가 영숙을 졸라대기 시작했다.

- 아주머니, 생각 좀 해봤소?

- ...

    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영숙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름을 눈치챈 득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밀어부치기 시작했다.

- 내가 아들 하나 보자고 이러는게 불쌍치도 않소.  나 죽으면 제사상 차려줄 상주놈 하나는 놓고 가야 안쓰겄소.  그라니까 아줌씨가 아들 하나만 떠억허니 앵겨주면 이보다 더 번듯한 가게 하나 차려줄테니.  응, 어떻소?

- 말로만 하는 약속 어찌 믿는다요?

    순간 영숙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속내를 눈치 챈 득수는 바로 종이를 찾는다.

- 내가 지금 빈말하는 거 아니랑께.  종이 갖고와 보소.  내 각서라도 써줄테니.

- 종이는 무슨 종이요.  됐고 지금 일하는 중이니께 난중에 오소.

    영숙은 득수가 종이를 가지고 와 각서랍시고 써준 것을 받으면 부정한 여인임을 인정하는 꼴이라는 생각에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득수는 거반 넘어온 영숙의 태도에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으례 게임의 승자들이 패자들 앞에서 하듯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웃음을 지으며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 내 약속은 목숨같이 지켜며 살아왔응께 걱정은 허덜 말드라고.

    득수는 그렇게 승자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가게 밖으로 나갔다.


    영숙은 남편이 있는 몸으로 남의 아들을 낳아주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는, 득수가 과연 약속을 지킬 것인가하는 걱정보다는, 자신에게 어떤 가게가 쥐어질까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번듯한 가게의 주인이 되어 일군들을 부리며 편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아들 하나 없이 살아가는 돈 많은 양반이 상주 노릇해줄 아들을 저리 간절히 원하는데, 남들은 도둑질에 거짓말하면서까지 돈을 버는데 까짓것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 못들어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내심 남편에 대한 아내의 정절을 생각하면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남편을 생각하기만 해도 그가 사업으로 탕진한 돈만 생각하면 정내미가 떨어졌다.

    그 돈이 어떤 돈인가?  친정 아버지가 그 악독한 일제 치하에서도 워낙에 근면성실하고 기술이 뛰어나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벌어온 돈이 아니던가.  하나 밖에 없는 딸이라고 애지중지하며 고된 일을 하면서도 허투루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집에 들어올 때 마다 온갖 귀한 선물들을 두 손 가득 들고 오시던 아버지의 소중한 땀방울들이었건만, 월남하여 이 집 저 집 다니며 막일을 하던 태주를 좋게 보아 온 아버지가 손수 짝지워주신 남편이 사업을 한답시고 홀라당 말아 먹었으니 어찌 이쁠까.  그런 남편에 대한 원망과 질책을 아무리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던 영숙은 자신이 직접 돈을 벌어 다시 집안을 일으켜 큰 소리 한 번 쳐보는 것도 좋게 여겨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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