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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04. 2020

#2  아내의 임신

#2  아내의 임신

    서른을 훌쩍 넘긴 몸이라서 그런지 아이는 쉽게 들어서지 않았다.  벌써 3개월 째이건만 언제 애가 들어서고 이놈의 못할 짓을 그만 둘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 영숙의 속은 타 들어갔다.  남편 태주가 멀리 일하러 갔기에 쉬이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벌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시간만 보낼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마음도 없는 사내에게 몸을 내주어야하는 것도 더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빨리 애가 들어서야 잠자리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이고, 그 핑계로 돈이라도 좀 더 요구할 수 있을텐데 무엇 하나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해 하고 있는 영숙이다.

- 애가 우째 안들어서는가? 좋다는 약까지 해다 줬는디.

- 내 우예 알겄소.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닌디.

- 너무 오래 가면 안 좋은디.  일단 이 달까정 애써 봅시다.

- 그게 뭔 말이요?

- 담달에 내가 일이 있어 멀리 좀 다녀와야 하거든.


    달이 넘어가자 득수는 별다른 말없이 있는가 싶더니 사업차 멀리 다녀오겠다는 말만 하고는 이내 떠나버렸다.  영숙은 아차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설마하는 생각이 더 컸다.  돈에 눈이 멀어 몸만 버린 멍청한 여편네는 되고 싶지 않았기에 득수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리 믿고 싶었던 것이다.


    득수가 떠나고 며칠 후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가 생긴 것을 알게 된 영숙은 날아 갈 것만 같은 기쁨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기에 혼자 방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질 상급을 누리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 했다.




- 애들아, 아빠 왔다.  

    득수는 커다란 대문을 힘있게 밀어 제끼며 아이들부터 찾았다.  아이들?  그랬다.  득수는 이미 두 아들과 딸이 있었다.  워낙 부유한 살림이라 별다른 직업없이 여기 저기에 현지처를 두고 세월 좋게 유람다니는 맛에 사는 한량이었던 것이다.  돌아다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거나, 바깥 생활이 지겨워 질 때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득수의 눈에 들어온 영숙은 자신이 여태 보지 못했던 미색이라 내심 입맛을 다시며 어찌 해볼 심산으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고, 그러던 중 남편의 사업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지고 그에 화가 난 영숙이 남편을 내쫓았다는 말을 듣고는 기회다 싶어 자식 하나 없이 쓸쓸히 늙어가는 신세인양 접근했던 것이다.  영숙에게 약속했던 가게는 어차피 감언이설이었고, 지금 머무는 곳이야 자기 집이 아니니 언제든 훌훌 털고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 나오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득수의 얼굴은 세상을 다 거머쥔양 너무도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득수가 떠나고 나서야 입덧을 하기 시작한 영숙은 이제 득수가 돌아오기만 하면 함께 가게 터를 찾으러 다닐 요량으로 이제나 저제나 하며 집나간 아들 기다리듯 애타게 기다렸다.  어떤 가게를 할까, 얼마나 크고 번듯하게 차릴까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하루하루 영숙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지만 득수는 소식이 없다.  멀리 간다했으니 금새야 안오겠지만 서너 달이면 되리라 생각했건만 불안이 스물스물 피어 오른다.  그래도 득수가 떠날 때에 비하면 한결 든든했다.  자신의 뱃속에 득수의 아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영숙은 그렇게 아이가 태어난 후의 날들을 상상하며 기분좋은 나날을 보냈다.  남편 태주가 기별도 없이 집으로 오기 전까지는.


    연이은 사업 실패로 처가 돈을 다 날려버린 태주는 아내 영숙의 성깔을 감당할 수 없어 내쫓기다시피 일자리를 찾으러 집을 나섰다.  오라는 곳 하나 없이 떠돌다 만난 고향 사람과 함께 일본까지 건너가 돈을 벌기 시작하였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기 그지 없었다.  이북에서 돈 많은 지주의 가족들은 모두 잡아 죽인다는 소리에 겁을 먹은 가족들이 맏아들만큼은 살리고자 홀로 남쪽으로 보내버린 후 휴전선이 그어져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듯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태주는 무척이나 외롭고 서러운 타향살이를 감당해 나가야만 했었다.

    그렇게 눈물로 살아가던 태주에게 영숙의 아버지가 자신을 사위로 삼아 가정을 이루게 해주고 아이들까지 태어나니 행복하기 그지 없었다.  영숙의 아버지가 고맙고 또 고마워 평생을 바쳐 처가를 돌보겠다 다짐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로 평생을 갚아도 못갚을 은혜를 베풀어주신 장인 어른의 재산을 모두 날려버린 태주는 눈앞이 캄캄했다.  차마 처가 식구들을 볼 수 없어 밖으로만 나돌며 돌파구를 찾아보는데 그런 모습을 참아 볼 수가 없었던 영숙의 성화에 이 곳 일본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홀로 피난을 왔기에 부모님과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이야 말로 할 수 없을만큼 컷지만 새로 꾸린 가족들이 있어 행복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들의 재롱과 커가는 모습을 보면 힘든 줄도 모르고 지냈던 태주였기에 머나먼 타향 일본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기쁨보다는 자식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이 더 컸다.  그렇다고 일자리를 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마침 명절이 되어 회사의 양해를 구한 태주는 들뜬 마음으로 고향을 향했다.  아이들에게 줄 맛난 과자랑 장난감, 아내에게 줄 예쁜 스카프를 양 손에 들고 가는 태주의 얼굴은 새까맣게 타 있었고, 볼살은 간데없이 핼쑥한 모습이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였다.


    근 일 년만에 집으로 들어온 태주는 자신의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아내 영숙의 배가 불러 있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텐데 도무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바로 쳐다 보지 못하고 문 앞에 비켜 서 있는 영숙이 차라리 변명을 하던 잘못을 빌던 무슨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지만 영숙 역시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태주는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가슴에 안고 아이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아무러 말도 없이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가족을 볼 수 있다는 기쁨은 새까만 재로 변했고, 세상 어디에도 없을 편안한 집은 잠시라도 거하기 힘든 어색한 곳이 되어 버렸다.  다시 돌아 올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을만큼 태주의 속은 하얗게 타버렸다.


    영숙은 그런 태주를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남편 태주에 대한 미안함과 아버지가 남겨주신 가산을 모두 탕진한 미움이 뒤엉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손에 든 선물 보따리를 문 앞에 내려놓고 잔뜩 풀이 죽은 채 뒤돌아 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시야가 뿌엿게 흐려지는 것이 분명 눈물이 고인 것이건만 영숙은 울지 않았다.  유별난 자존심이 유독 태주에게만 발현되는 탓에 미안하단 말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  영숙은 아버지가 신랑감이라고 데려온 태주가 겉으로 보기엔 훤칠하니 어디에 내놔도 대장부 소릴 들을만한 외모의 소유자이기에 내심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홀로 이북에서 내려와 고아처럼 지냈다는 말에 조금 얕잡아 보던 게 있었다.  머리 좋고, 힘도 좋은 태주가 성심으로 일하는 모습과 어떤 문제도 척척 해결해 나가는 능력이 영숙의 부잣집 외동딸 특유의 교만과 허영을 드러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태주의 사업 실패는 영숙이 그간 부리지 못했던 빈털털이 태주를 향한 삐뚤어진 우월감을 누리게 해주는 빌미가 되었다.  그런 영숙에게도 십 수 년을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을 향한 죄스러움이 왜 없겠는가만은 자존심이란 놈은 그때마다 사정없이 싹을 밟아버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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