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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06. 2020

#3  부도난 어음

#3  부도난 어음

    장차 번듯한 가게와 맞바꿀 어음이 영숙의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득수는 돌아올 기미가 없다.  곧 오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하던게 벌써 반 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득수는 소식도 없다.  설마 설마하면서도 그래도 지 자식이니 오기는 올 것이라 믿었건만 이제는 그 믿음도 봄 눈 녹듯 사라져만 갔다.


    빨래감을 들고 냇가에 간 영숙은 우물 가에 모여 동네 사람들 하나씩 입방에 올려 놓고 이리 찧고 저리 찧는 아줌마들을 발견하고는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는 한쪽 구석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중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던 이가 내력없이 득수 이야기를 꺼낸다.  순간 심장이 덜컥하며 내려 앉을 뻔 했지만 낌새를 보니 자신과 관계된 줄은 모르는 눈치다.  내심 궁금하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시큰둥하게 말 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듯 주섬주섬 빨래감들을 꺼내 놓았다.

   빨래를 빤 건지 지 옷을 빤 건지 모를 만큼 젖어버린 옷에 여기저기 비누 거품을 휘날리며 마치 자기 일인양 득수의 이야기를 쉬지 않고 뱉어내는데 듣자하니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동네 아줌마들의 흔한 수다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영숙 자신은 걸려도 단단히 걸린 관계가 아니었던가.  몸은 무심한 듯 빨래만 하는 듯 하지만 영숙은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자라도 놓칠까 신경을 세웠다.

- 읍내에 어린 처자 델꾸 산다는 허우대 멀쩡허니 생긴 득수라카는 이가 있는디, 임자들 들어 봤는가?  그 처자를 얼마 전 전주에 갔다가 만난 이가 말해준건디 어디 가서 말하지들 말드라고.  득수라카는 이가 본시 집은 딴데 있고, 여기저기 다니며 한량으로 산다는구만.  지두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하드만.  일 년만 같이 살아주면 가게 하나 차려준다해서 여까지 왔다는디,  근디 일 년 딱 지나니께 가게 하나 떠억하니 안겨주더라는거야.  그래서 지금은 잘 먹고 잘 산다는디 내는 우째 영 그러네.  누구는 돈이 많아 고생 하나 없이 한량으로 살고, 누구는 돈 많은 놈 만나 잠시 살아주고 가게 얻고.  에잉, 돈 많은 신랑이 있기라도 허나, 내헌티 가게 채려준다는 놈팽이가 있기를 허나.  에휴, 이놈의 팔자라곤...


    듣고 있던 영숙은 쿵하며 심장이 내려 앉는 느낌이었다.  하늘이 온통 깜깜해지고 빙그르르 도는게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말 많은 여인네들 앞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아니 내색이라도 했다가는 그날로 득수의 노리개 중 하나라고 동네방네 소문이 날 것이기에 빨래를 마칠 때까지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참아낸 영숙은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 왔다.


    밤새 한숨도 못자고 끙끙대던 영숙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날이 새자마자 득수의 집으로 찾아 가 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낯선 이가 살고 있었다.  영숙이 알고 있던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아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았지만 그들 역시 알 리가 없다.  영숙은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 들고 몸의 균형을 잃을 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확인해보았다.  몇 번을 물어도 모르는 걸 어찌 말해줄 수 있을까.  

    영숙은 발 걸음을 돌려 돌아 오던 중 득수의 집 근처에 있는 가게로 들어가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보기로 한다.  다행히도 가게 주인은 약간의 내막을 알고 있었다.  득수가 지난 해 초봄 무렵 어린 처자 하나를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살다가 다른 곳으로 떠난 지 반 년쯤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영숙은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지만 꾸욱 눌러 참아내며 가게 주인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별다른 벌이도 안하는 것 같은데도 씀씀이가 예사롭지 않아 동네 입담가들의 입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더라는 말이며, 처라는 여인은 아무래도 반듯하게 자란 규수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말 등을 듣다보니 어제 빨래터에서 말많은 여편네가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영숙의 얼굴은 굳게 굳어 있었다. 길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기에, 혹여 길에서 우는 자신을 누군가가 발견하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생각을 하면 더더욱 길에서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굴은 밀납인형처럼 하얗게 굳어 조금의 미동도 없었지만, 영숙의 머리 속은 폭풍우에 휘돌아치는 바다에 다름 아니었다.  이 일을 어찌 할꼬, 동네 창피해서 어쩌나, 친정 어머니와 아직은 어리기만 한 열 살 안팍의 아이들에겐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벌건 대낮인데도 깜깜하기만 했다.  


    온 몸에 한 올의 기력도 없는 영숙이었지만 그녀의 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작은 고개를 넘자 저 멀리 집이 보였다.  조금 더 걸어가니 굳게 닫힌 대문이 보였다.  순간 자신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실망과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아무 말 없이 뒤돌아 가던 남편 태주의 뒷모습이 떠오르며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영숙의 온 몸을 휘감아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왜 그리도 모질게 대했을까, 왜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싸늘한 눈으로 남편을 맞이 했을까, 남편이라고 왜 사업에 실패하고 싶었을까하는 자책과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는커녕 왔느냐는 말도 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에 그간 모르고 지내왔던 남편을 한 무시와 이유없이 얕잡아보았던 오만함이 실체를 드러내자 영숙은 말할 수 없는 참담함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세상이 무섭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곱게 자란 영숙이 그런 것들을 경험해 볼 기회나 있었으랴.  비싸디 비싼 값을 치루고 알게 된 세상은 사랑하고 존경하던 아버지가 누차 강조하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갑자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늘 웃어주기만 했던 바보같은 남편이 밖에서 겪었을 세상의 무서움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에 한없이 미안했다.  그리움의 눈물은 이내 자책의 눈물로 바뀌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기둥으로 한결같이 보호해주고 애써주던 태주에 대한 고마움을 전혀 몰랐던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이제야 남편 태주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 영숙은 죄스러움과 함께 엉키어버린 속이 참을 수 없이 더럽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순간이었다.  영숙은 내리막 길 곁에 우둑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바위에 올라 뛰어 내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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