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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07. 2020

#4  지우지 못한 생명

#4  지우지 못한 생명

- 아야, 이제 쬐매 정신이 드나?
    순자는 자정 무렵에야 겨우 눈꺼풀을 들썩이는 영숙의 눈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조금씩 들썩이는 눈꺼풀이 꽤나 무거워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딸이 낙상해 깨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소식에 십 리가 넘는 길을 한 달음에 달려 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지만 어쩐 일인지 정신을 못 차리는 통에 의원을 불렀는데, 그만 의원의 입을 통해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와 산모 둘 다 무사하고 조금만 안정을 취하면 된다는 의원의 말에 어미의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아이라니...   분명 사위 태주가 집을 떠나 돈을 벌러 나간지가 일 년이 얼추 되어 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왔다 갔을 리는 없고, 외동딸 영숙이 부정을 저질렀을 리도 만무하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친정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영숙은 한 줄기 눈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눈이 잘 떠지지도 않았지만 굳이 눈을 떠 엄마의 얼굴을 바라 볼 자신도 없었던 영숙은 그제야 자신의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 큰 이상은 읍다드라.  아그도 괘얀코.

    아기.   태어나기만 하면 번듯한 가게로 바뀌어 영숙의 품에 대신 안길 약속 어음과도 같은 존재.   하지만 그 약속 어음은 결국 의도적인 부도로 결정지어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음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더해져 아기를 떨쳐 버리려 바위 위에서 뛰어 내렸건만 괜찮다는 말을 친정 엄마의 입에서 듣게 된 영숙은 눈이 번쩍 뜨였다.   영숙은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이 어떤 상태였는지도 모르는 채 부엌으로 향했다.   순자가 어미의 직감으로 자신을 붙잡지만 않았어도 영숙은 부엌에서 간장을 들이킬 작정이었다.   영숙은 언젠가 들은 간장을 들이키면 애가 떨어진다는 말이 떠오르기 무섭게 일어나 부엌으로 가려했지만 쭈글쭈글해진 손으로 자신의 발을 붙잡는 친정 엄마를 뿌리치기엔 무리였다.
- 엄니, 노소.  아 떼야한당께.
- 멀쩡한 생명 죽이면 천벌 받는 법이다.  안 된다.
- 엄니, 조옴.
- 니가 아 떼내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찌 되았든 니 새끼다.

    영숙은 결국 순자의 손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남의 아이를 가진 자신이 한심해서 울었고, 자신을 속인 득수가 미워서 울었고, 돈에 몸을 판 셈이 된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 울었고, 돈에 집착하도록 재산을 말아먹은 남편 태주가 원망스럽고 미안해서 울었다.   그런 딸의 모습이 안쓰러워 순자도 울었고, 어린 세 자녀들은 엄마와 외할머니의 그런 모습이 무서워 따라 울었다.

    그 후로도 영숙은 친정 엄마 몰래 한의원에서 낙태에 즉효라는 약을 지어 먹기도 했고, 언덕을 구르기도 하고, 도둑놈의 지팡이를 갈아 먹기도 했지만 몸만 망가질 뿐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했다.   친정 엄마의 계속되는 설득까지 더해지자 낙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했다가는 오히려 산모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의원의 말이 적잖이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영숙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뻔한 살림이지만 날마다 고기 한 점이라도 딸에 입에 넣어주려는 친정 엄마의 수고와 사랑에 영숙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어 갔고, 뱃속의 아이도 커져만 갔다.   출산 준비도 더불어  셈이다.



2019년 9월
- 자기야, 아직 준비 안 된거야?  언능 가자.
- 어, 지금 나가.
    민준은 문을 반쯤 열고는 아내 영주를 아이처럼 재촉하였다.   영주는 임신을 한 후로 점점 아이가 되어가는 남편이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진중한 모습이 듬직하게 느껴져 결혼까지 했는데 지금은 영 가볍기만 한 남편 민준이지만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저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오늘만 해도 어디서 듣고 왔는지 계단 운동을 하면 아기를 쉽게 낳는다며 퇴근하기도 전에 전화로 외출 준비를 하라고 하더니 집에 와서는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서 저리 재촉을 해댄다.   한동안 조심해야 한다는 말에 바깥출입을 삼갔던 영주는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기도 했다.
    잠시 걸었을 뿐인데 벌써 힘들어 하는 영주의 손을 잡고 가볍게 당겨주는 민준은 나들이라도 나온 양 신이 났다.  민준은 자신의 2세가 곧 태어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신기했다.   민준은 곧 태어날 아이에게 세상의 둘도 없는 자상하고 재미있는 아빠가 되어 주리라 다짐했다.  어떻게 해야 잘 키우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가족은 가족이되 여느 가족처럼 함께 생활해 본 적이 없었던 민준은 특히 아버지와는 지금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해본 것이 한이 되었다.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좋지 않아 따로 떨어져 살기 시작한 것이 꽤 오래 되었다는 것만 짐작할 뿐 왜 그런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물어볼 생각도 못했었다.   형제들도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 민준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민준은 이제 곧 태어날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직장 동료들과 선배들의 조언에 의지할 뿐이었다.   그런 선배들이 오늘 민준에게 임산부에게 계단운동을 많이 시키면 아이를 쉽게 낳고 산후조리에도 좋다는 말을 해 주었던 것이다.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 영주의 뒤에서 민준이 팔을 뻗어 영주의 걸음 속도에 맞춰 밀어준다.
- 자, 조금만 힘내.  얼마 안 남았어.  도착하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민준은 대답도 못하고 씩씩 대는 영주가 듣든 말든 열심히 주절거리며 밀어준다.

-------------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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