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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08. 2020

#5  이름 없는 아이

#5  이름 없는 아이

1970년 12월 20일.
    영숙은 자신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 평온하게 자고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로 바뀌어 있어야 할 아이.   아니, 애초에 태어나지도 잉태되지도 말았어야 할 아이.   그런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 느끼는 영숙은 끝끝내 태어나 버린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키우자니 남편 태주와 영영 멀어질 것 같고, 버리자니 엄동설하의 날씨에는 차마 못할 짓이라 어디 고아원이라도 찾아볼 생각까지 하였다.
    이런 저런 고민 중에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아이는 지 아빠를 닮아서인지 제법 귀티가 나는게 보통 인물은 아니겠다 싶었다.   영숙은 순간 흠칫 놀랐다.   아이가 태어난 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지만 그간 아이의 얼굴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찌된 일이든간에 자기 배 아파 낳은 아이건만 따뜻하게 안아주기는커녕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않은 영숙은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 용솟음치는 모성애조차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영숙은 그것이 모성애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와 서글픔이라 여겼다.   아이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영숙은 남편 태주와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부정함으로 인해 평생을 고개 숙이고 살아야 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서 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아이를 버리면 당장은 가슴이 시릴만큼 아프겠지만 그 후로는 간간히 아이로 인한 가슴앓이는 있을지언정 그 누구도 아이로 인해 자신에게 손가락질하지는 않을 터이니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싶은 영숙이었다.   영숙은 여전히 남편에 대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자존심이 꼿꼿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아직 아이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짓는 것이 보통이건만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어야 할 아비가 없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비가 있었다한들 어찌 이름을 지어주겠는가.   친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 내 왔다.
    순자는 바깥 날씨가 어떤지 알려 주려는 것처럼 온 몸을 꽁꽁 싸맨 채 방으로 들어섰다.   점심 먹은 후 말도 없이 슬며시 나갔던 엄마의 행적이 궁금하기도 하련만 영숙은 만사가 귀찮은 듯 아무런 대꾸도 안했다.   그런 영숙의 모습이 마냥 안쓰럽기만한 순자는 겹겹이 껴입은 옷을 하나씩 벗으며 작은 종이 한 장을 내어 밀었다.
 영숙은 마지 못해 받아서 펴 보았다.
- 이게 뭐요?
    종이에는 진한 붓 글씨로 ‘한 민준(韓 旻俊)’이라고 쓰여 있었다.
- 아 이름 받아 왔다.   아가 사주가 억수로 좋단다.   하늘 민(旻) 준걸 준(俊)해서 재주랑 슬기가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나라고 지어주드만.   우째, 마음에 드나?
    누가 이름 지어 달라드냐라고 쏘아붙이고는 싶었지만 그래도 이름은 있어야겠기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넘긴 영숙은 민준이라는 이름이 아이에게 참 어울린다 싶었다.   아이는 마치 자기 이름이 생겼으니 한 번 불러 보라는양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영숙을 쳐다보았지만 영숙의 입에선 가느다란 한 줄기 숨결만 길게 새어나올 뿐이었다.

- 낼은 면사무소 가서 아 낳았다고 신고해야긋다.
    영숙은 화들짝 놀랐다.  
- 엄니, 그게 먼 소린가.  아니될 말이오.  출생신고라니.
    출생 신고를 하면 천상 아이를 키워야 된다는 말인데 영숙에게 그건 아니될 말이었다.   영주는 아이가 불쌍하긴 하지만 아이 하나 희생시켜 자신의 부정을 조금이라도 묻어두고 남편 태주가 자신에게 돌아올 길을 터주겠다는 심사였다.   아이 때문에 평생 남편에게 숙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배배 꼬인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 그라믄, 니가 배 아파 난 새끼를 갖다 버리기라도 할 셈이냐? 니가 낳았으니 니가 책임을 져야제.
    영숙은 엄마의 말에 변변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속에서는 안된다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당치않은 것들이긴 하지만 핑계거리들이 쌓여있어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내고 있는 어미에게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순자는 면사무소에 가서 민준의 출생을 정식으로 신고했다.   그리고 새로 발급받은 호적등본을 한 장 떼어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순자는 돌아오는 내내 착찹한 심정을 어찌하지 못하였다.   손주를 보니 좋기는 하지만 딸과 사위 사이에서 나온 아이가 아니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뾰족한 수가 필요한데 그런게 있을 리가 없었다.   사위가 아무리 사람 좋다는 소릴 들을지언정 자기 씨앗도 아닌 남의 씨앗을 키워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래도 잘 사정하면 아이를 내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혹여 내치려한다면 순자 자신이 아이를 키우리라 다짐하면서도 모든게 잘 되었으면 하고 바래 본다.




    태주는 주변에서 말릴 정도로 일에 파묻혀 지냈다.   조금이라도 멈추면 아내 영숙의 살짝 불룩해진 배가 눈 앞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 모습만 나타나면 태주는 괴로움에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처음 몇 날은 술의 힘을 빌려보기도 했지만 술을 마시는 동안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과 아이가 태어나는 상상까지 더해지니 미칠 노릇이었다.   게다가 아침에 깨어 일어나면 더 괴로웠고 계속되는 술에 속만 상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아야 하는 목표가 있었떤 태주는 술을 마시기 보다는 일에 미치기로 작정했다.   숙소에 들어가면 바로 쓰러져 잠이 들만큼 일을 하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차라리 그 편이 태주에게는 더 낫기도 했다.  
    태주는 그렇게 매일 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 씻지도 않은 채 이불 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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