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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20. 2020

#11  용서와 이해의 사이에서를 마치며

용서와 이해의 사이에서 화해를 만나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자신이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훨훨 날갯짓을 하며 창공을 기분 좋게 날아다니느라 미처 자신이 장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홀연히 잠에서 깨고 보니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윽고 장자는 기괴한 생각에 잠겼다.  내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의 꿈 속에 내가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모두 꿈을 꾸고 있고, 내가 그대에게 말을 건네는 이 순간도 꿈일지 모른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이와 같은 일들을 일러 기괴하다고 한다.  만세(萬歲) 뒤에라도 성인을 만나 해답을 구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 제물론(齊物論)에서


    글이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내가 글의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민준이 나를 꿈꾸는가, 내가 민준을 꿈꾸는가?  실체가 무엇인지 무엇이 중요할까?  깨어있는 나와 꿈꾸는 나는 다르지 않으니 현실에서 살아 가고 꿈에서도 살아 간다.


    지난 40여 일간 댓글들로 인해 자신감을 얻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타기도 하고, 구름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도 느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전에 그리고 올린 후에도 써놓은 글들을 수십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허망한 감정의 눈속임들을 뒤로 하고 과거와 마주 앉아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동안 전혀 문제가 될 상황이 아님에도 격한 감정에 울컥하여 분위기를 망치고 관계를 훼손시켜왔던 원인에 대해 찬찬히 그리고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얼마나 다행인지.

    용서를 할 수 있나에 대한 질문보다는 용서를 해야 할 사안인가에 대한 질문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왜 그런 선택들을 하였는지에 대한 질문 대신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지금 내 나이가 당시의 어머니보다 열 살 이상 많다.  시대 상황이야 많이 변했겠지만 그래도 나보다 어린 어머니의 선택과 선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잘한 선택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못했다 질책할 마음도 없다.  누구에게나 선택은 자유로우니까.  단지 선택에 대한 책임만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의 선택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감당했다.  첫 번째는 무위로 돌아갔지만 두 번째는 그럭저럭 감당해내었다고 본다.  어머니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전해주지는 못했지만 그것 역시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느라 그랬던 것이었으니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머니를 전혀 원망하지 않는다.  외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으니.

    과거로 인해 대인 관계는 원만치 않았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 나누고 함께 무엇인가를 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은 받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갈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과의 관계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을 철저하게 피했다.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는 나였지만 조금이라도 나의 과거와 연계될 가능성이 있는 주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피했다.  그러다보니 관계의 깊이가 없다.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거나 몇 주만 안 만나도 관계는 여지없이 깨졌다.  깨졌다 표현하기도 애매한 관계였을 뿐이다.  이런 문제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주치기 싫은 정말 머릿속에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와 맞닥뜨려야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코로나를 핑계로 예전에 시도해봤던 글을 통한 치유라는 방법을 다시 꺼내보았다.  그리고 소설처럼 허구와 섞어가며 풀어보았다.  때로는 소설을 쓰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고, 때로는 감정의 벽에 부딪혀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노트북을 덮기도 했고, 밀려오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맞아 정신없이 울 때도 있었다.  그러기를 한 달가량 반복하다보니 조금씩 객관적으로 과거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마주하니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과거의 부분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들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해가 되기도 했다.  과거가 이해가 되기 시작하니 이제는 용서라는 단어보다는 이해라는 단어보다는 화해라는 단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와의 화해, 그리고 어머니와의 화해.  아직은 어머니와 화해하기에는 쌓아놓은 것들이 많아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나와의 화해는 충분히 가능하고 많이 진행된 상태이다.  누구에게도 풀어놓지 못한 이야기들, 이제 겨우 브런치라는 가상의 공간에 조금 풀어놓았을 뿐인데 브런치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내가 보기에는 뭔지 모르게 변했다한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조금 더 온화해진 것 같다고, 조금 더 여유 있어 보인다고.

    아, 글의 힘이라는 게 이렇게 대단하구나.  글을 통해 용서와 이해에 대해 사유해보고자 했었던 내가 글을 통해 용서와 이해의 사이에서 화해를 만나게 될 줄이야.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글이 알려준 것이다.  글을 쓴 것은 나였지만 길을 알려준 것은 글이었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은 구독자님들이었다.  특히 댓글을 통해 진심을 담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신 분들이 아니었다면 글을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장편으로 써야 할 분량을 매거진이라는 형태에 맞추다보니 구성이 어설퍼졌고, 가독성을 고려한다는 핑계로 1회 분량을 조절하다보니 단편이라 하기에도 너무 짧게 마무리 되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았으니 되었다.  과거에 얽매여 현재와 미래에 하등의 도움도 안 되는 것들에 나를 소모하지 않게 되었으니.  화해를 만나니 용서와 이해가 보다 쉬워졌다.  철옹성처럼 보였던 용서와 이해이건만 이제는 해볼  하겠다 여겨진다.

    이제 하루하루 펼쳐지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맛보며 살고 싶다.  처음 시작해보는 오늘을 처음 만나는 오늘의 아내 처음 만나는 오늘의 아이들과 처음 만나는 오늘의 타인들과 처음 나누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처음 써보는 글을 통해 처음 만나는 독자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용서와 이해의 사이에서'를 끝까지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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