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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23. 2020

#1  신비한 거울의 출현

로키의 장난감

    거울. 아주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여전히 고풍스러운 멋을 드러내는 거울은 장난꾸러기 로키(북유럽의 장난의 신)가 인간들을 곯려먹기 위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장난남 중 하나다. 로키는 가끔 이 장난감을 아무데나 던져놓고는 벌어지는 일들을 즐기곤 했다.




    진태는 새로 이사한 집이 마음에 들었다.  집 뒤에 자그마한 산이 있다는 것이나 조용한 마을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걸핏하면 술 냄새를 풍기거나 한 밤 중에 싸워대는 맘에 안 드는 이웃들과 현관을 함께 드나들어야만 하는 다세대 주택이 아니라 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자그마한 2층 집이라는 점이 좋았다.  겨우 차 한 대 세워 놓을만한 공간이긴 하지만 날 좋은 주말에 가족들이 고기를 구워먹기엔 충분히 넉넉한 정원 겸 주차장도 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지하 창고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새로 진학한 학교도 그리 멀지 않았다.

    집에 창고가 있다는 것이 아파트나 빌라만 보아오던 아직은 어린 진태에게 생소하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아지트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삿짐을 날라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지하 창고로 들어간다.  창고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있었다.  빗자루로 거미줄을 걷어내며 안으로 들어가던 진태는 한 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거울을 발견했다.  아마도 전 주인이 버리고 갔나보다 생각한 진태는 거울을 갖다 버리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거울이 왠지 진태의 눈길을 끄는 것이 아닌가.  생각보다 멀쩡한 상태였던 거울은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였지만 유럽의 저택에서나 어울릴 듯 한 고풍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었다.  진태는 들고 있던 빗자루로 거울을 한 번 쓸어내고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교복에 빗자루를 든 모습이 늘 학교에서 청소하던 모습과 겹치면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멀쩡한 거울을 버리기도 그렇고 왠지 마음이 가기도 해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늦게까지 짐정리를 하느라 애썼던 후유증에 온 몸이 노곤 노곤했지만 오늘 정리를 일찍 끝내야 숙제를 할 수 있고 내일 학교에서 선생님께 불려가지 않을 것이기에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사를 핑계로 선생님의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차이인가 보다.  어차피 숙제가 목적이니 필요한 것들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천천히 하자는 심산으로 일단 학업자료들만 정리하기로 했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진학한 진태는 학교 외에도 세 과목의 학원 수업을 듣고 있어 해야 할 공부도 많다.  대충 정리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부모님은 짐정리에 정신이 없어 식사를 준비할 엄두도 못 내고 있어 배달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소화도 시킬 겸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한 진태는 자연스레 창고로 향한다.  부모님이 이미 청소까지 해놓으셨는지 말끔하게 변해있었고, 거울은 벽에 걸려있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진태는 내일 학교에 갈 일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등교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교실 안에서는 권력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진태는 큰 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평균을 살짝 웃도는 키였다.  그 덕분에 중학교 때는 힘 좀 쓰는 아이들에게 당하고 살지는 않았다.  단지 체격이 그닥 좋지는 않아 언듯 보기엔 깡마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군살이 없을 뿐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자신의 체격을 자세히 들여다 볼 것도 아니고 대충 봐서 만만해 보이면 깔아뭉개려 들 것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고등학교에 올라오니 다들 체격이 상당했다.  성격이 모질지 못한 진태는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성깔 있는 체 하지 못했기에 서서히 서열이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은 중간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지만 권력이라는 게 아무것도 안하면 점점 내려갈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걱정이다.  1학년 초반부터 노예 계급으로 전락하면 3년 내내 헤어 나올 수 없을 텐데.  성적에 대한 걱정보다 학급내 권력서열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진태는 갑자기 느껴지는 섬뜩한 기분에 뒷머리가 쭈삣 솟아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창고에는 진태 혼자 뿐이었다.  진태의 두 눈이 커지면서 조금씩 조금씩 거울 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왠지 거울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든 것만 같았다.  미동도 없는 거울이지만 왠지 보면 볼수록 진태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순간 겁이 난 진태는 후다닥 밖으로 나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족들이 보이자 그제야 안정을 찾은 진태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혼자 겁먹은 게 어이없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책을 펴고 공부를 하려는데 자꾸만 거울이 떠올라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꾹 참고 공부에 집중하려는데 도저히 안 된다.  진태는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분명 거울이 무슨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엔 겁이 덜컥 났었는데 이제는 호기심이 조금 생겼다.  어차피 공부에 집중이 안 되니 핑계 김에 궁금한 것부터 해결하자 생각한 진태는 다시 창고로 간다.  대낮이니 귀신같은 건 안 나오겠지.

    진태는 거울 앞에 서서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울이 하는 말을 들어보려 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진태는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거울이 무슨 말을 한다고.  이제 그만 방으로 가려고 돌아서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보였다.  몸을 돌려 거울을 보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이상이 없었다.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하면서 몸을 트는 순간 또 다시 거울 속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다.  진태는 온 몸에 돌기가 일어나고 뒷머리가 일어나 뻣뻣해져 있음을 느끼면서도 다시 한 번 찬찬히 거울을 들여다봤다.  뭔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한참을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몸을 살펴보는데 콕 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뭔가 다른 것 같았다.  오랫동안 운동을 해 온 선수들의 그것처럼 당당하게 펴진 가슴과 손가락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돌덩이처럼 단단한 육체를 거울 속의 진태는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은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진태는 시선을 거울에서 자신의 몸으로 옮겨 확인해 보았다.  자신의 몸을 본다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가.  거울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진태는 의아해 하면서도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실제 자신의 모습인 줄로만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알통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보디빌더들이 취하는 포즈를 잡아보기도 하면서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즐기기 시작한다.

    교실에 들어서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벌써 와서 끼리끼리 모여 떠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진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저 한 번 힐끗 보고는 이내 떠들기에 바빴다.  자리에 앉은 진태는 혼자 공부하고 있는 병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니 병수도 아는 체를 한다.  그런데 병수가 진태를 빤히 쳐다본다.  
- 왜?
- 아니, 뭔가 좀 느낌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뭐가?
- 아니,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병수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다시 공부에 집중한다.  싱거운 놈.  진태는 가방을 열어 책이며 노트들을 꺼내 책상 서랍에 넣고 있는데 첫 날부터 거들먹거리던 승우가 느끼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 이야, 너 요즘 운동하나보다?
- 뭔 소리야?
- 몸이 단단해진 것 같은데.  무슨 운 동하냐?
- 운동은 무슨, 학원 다니기 바빠 죽겠구만.
진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승우였지만 무시할 수는 없기에 대답을 하면서도 괜히 으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 매여 있었던 진태는 집으로 돌아와 씻자마자 창고로 가 거울 앞에 섰다.  내 몸이 좀 단단해 보인다고?  진태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거울 속의 진태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교실에서 힘 좀 쓴다고 건들거리는 것들, 그런 놈들이랑 같이 어울리면서 깝죽대는 것들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는 자신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약해 보이는 아이들을 괴롭히면서 돈을 뺏거나 빵셔틀을 시키는 놈들을 소환해 한 놈 한 놈 줘 패는 상상은 기분 최고다.  그리고 보니 거울 속의 진태가 단단해 보이는 것을 넘어 제법 쎄 보였다.

    오늘도 소위 일진으로 분류되는 놈들은 교실에서 가장 약해보이는 아이들을 골라 괴롭힌다.  쉬는 시간마다 그런 꼴을 보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제지할 만한 별다른 수단이 없어 쓴 맛만 다셔왔는데 오늘은 참기가 힘들었다.  일상과도 같은 그런 모습에 익숙해진 진태는 평소와는 달리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싸워 이길거라는 보장은커녕 한 방에 노예계층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참아왔다.  그런데 오늘은 도무지 참지를 못하겠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 승우야.
승우를 불렀다.  진태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 뭐?
- 수업 시간 다 됐는데 그만 하지.
승우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별말 없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 다행이긴 하지만 진태는 이 시간이 끝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까짓것 싸우면 싸우는 거지 하며 용기를 내어본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승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넘어갔다.  아니, 진태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다들 집으로 학원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승우가 와서 나지막하게 말을 한다.
- 너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만 한 번만 더 그러면 죽여 버린다.  명심해.
진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승우를 노려보기만 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진태는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의아해 했다.  전과 달리 대범해진 자신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냥 넘어갈 승우가 아니었는데도 그냥 넘어간 것이 이상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창고로 간다.  거울 앞에 선 진태는 거울 속의 진태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건 없는데 왠지 풍기는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았다.  좀 쎄 보인다고 해야 하나.  전과 달리 쎄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태는 거울 속의 강해보이는 진태가 승우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바닥에 널브러진 승우를 올라 타고는 주변의 아이들이 말릴 때까지 두들기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진태는 아침부터 병수를 괴롭히며 돈을 뺏는 장면을 보게 된다.
- 야, 한 승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하는 승우는 문 앞에 서서 가방을 내려놓는 진태를 발견한다.
- 뭐?
- 아침부터 뭐하는 거야, 그만해.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은 아예 아침부터 딴지거는 진태를 째려보며 승우가 한 쪽 입술을 들어 올리며 대답한다.
- 이게 죽을라고.  못하겠다면.
    퍽.  예상치도 못한 상태에서 날아온 진태의 주먹에 제대로 맞은 승우는 뒤로 물러나면서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순간 진태는 넘어진 승우 위로 올라타더니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한다.  진태 역시 자신이 이럴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다.  잠시 후 아이들의 눈에 두 팔로 얼굴을 감싸고 얻어맞기만 하는 승우의 모습이 들어왔고 이내 너나 할 것 없이 진태와 승우를 떼어 놓았다.
- 야, 야, 그만해.  쌤 들어올 시간이야.
    아이들의 이끌림에 자리에 앉은 진태는 씩씩대며 승우를 째려보았다.  승우는 그 잠간의 시간동안 꽤 많은 상처들이 생겼다.  단 한 번도 주먹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승우는 이제 감히 진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  감사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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