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싼타페 Jun 26. 2020

신비한 거울 #2

#2  지배구조의 개편

    수업 시간 내내 진태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어떻게 승우가 한 방에 나가 떨어졌으며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얻어맞고만 있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진태의 속내야 어떻든 진태는 이제 반에서 상위권에 드는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권력의 이동에 민감한 몇몇 아이들이 진태에게 다가와 친한 척한다.  남자 아이들은 물론 여자 아이들도 진태를 달리 보기 시작한다.  딱히 잘 생긴 건 아니지만 평범한 얼굴을 빛내주는 탄탄한 몸매에 얌전하게만 생활하던 친구가 갑자기 정의의 기사가 되어 약한 친구를 도와주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다가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덕분에 기대치 않았던 도움을 받게 된 병수는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들고 와 진태에게 건넨다.
- 고마워.  이거 먹을래?
- 고맙긴.  근데 이런 건 뭐 하러 사왔냐, 암튼 잘 먹을께.  고마워.
- 너 이런 모습 의외긴 한데 왠지 어울려 보이긴 한다.
- 응?  으응.  그래, 고마워.
    승우의 일방적인 패배로 인해 승우와 어울리던 몇몇 아이들이 진태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하게 지낸 하루였다.  덕분에 교실은 처음으로 평화로웠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분위기에 취해 떠들고 장난치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유독 태섭은 이런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지배구조가 없는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한창 혈기왕성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딩들의 세계에 평화라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승우가 당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본 터라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  또한 쉬는 시간마다 자신들에게 와야 할 빵과 우유들이 진태에게 상납되는 모습과 여자 아이들이 진태 주변에 몰리는 모습은 태섭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래 아니 짧은 십칠 년 인생에 처음으로 여자 아이들 틈에서 주인공이 된 진태는 기분이 한껏 들떴다.  이런 게 권력의 맛인가.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공수해오는 빵과 우유는 내심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상납이 아닌 축하 선물이라 생각했다.  아이들과 마음껏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데 순간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이상한 점이 없다.

    집에 들어오니 창고에 불이 켜져 있다.  진태는 순간적으로 뛰었다.  뛰어야하는 이유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생각할 겨를도 없이 뛰는 진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 아빠?
   거울을 보고 있는 아빠의 모습에 불안감은 더욱 커진다.  
- 어, 이제 들어오냐.  밥은?
- 여기서 뭐 하세요?
    진태는 밥 먹었냐 물어보는 아빠의 말은 들은 둥 만 둥 거울을 왜 보냐는 듯이 물었다.
- 아, 안방에 거울이 없어서 이걸 가져다 놓으면 어떨까 하고...
    순간 진태는 덜컥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결코 거울을 빼앗길 수는 없다.  이건 내꺼야.  아무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어.  진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도 알지 못했지만 거울을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 이거 제가 저녁마다 운동하면서 자세 확인하는데요.  그리고 이런 촌스러운 걸 안방에다 걸어놓으면 엄마한테 잔소리 들으실 텐데.
- 그렇겠지?
- 그럼요.  이런 건 창고에 있는 게 더 어울려요.
    진태는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자기 방에 걸어 놓아야 한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와 무를 수도 없으니 난감하지만 어쩌랴 싶었다.  그래도 안방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진태다.
저녁을 먹은 후 창고로 내려 간 진태는 거울을 보면서 새로운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반 아이들이 자신의 지배 아래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모습에 웃고 있는 모습, 여자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을 혼내주라며 이르는 모습, 반에서 최상위 지배자의 자리를 노리는 아이들을 물리치는 모습까지 상상하며 혼자 히죽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온다.  아빠 영환이다.
- 여기 있었냐?
- 웬일이세요?
- 응, 니가 쓴다니까 소화도 시킬 겸 운동삼아 깨끗하게 닦아줄라고.
- 에이, 그런 건 제가 할께요.  저 운동하게 올라가세요.
    진태는 아빠가 자꾸 거울 근처에 오는 것이 싫다.  혹시라도 거울을 욕심내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아빠가 나간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보는 진태는 지난 며칠간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거울을 보면서 상상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는 게 전혀 상식 밖의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니 뭔가 비밀을 간직한 거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내친김에 반에서 가장 쎈 놈을 넘어뜨리는 상상을 해본다.  만약 내일 지금의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이 거울은 분명 만화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마법의 거울이 틀림없을 것이다.

    늦은 밤, 영환은 불 꺼진 거실을 조심스레 지나 밖으로 나온다.  새로 맡게 된 프로젝트와 관련해 상사에게 한 소리 들은 영환은 심란함에 잠이 오지 않아 담배나 한 대 태울 심사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간 다루어왔던 것들보다 훨씬 큰 건이었다.  잘되면 진급 대상에 일순위로 오르겠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결과는 생각조차 하기 싫을 만큼 처참할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 치고 올라오는 빠릿빠릿한 후배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보이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어찌 그리 똑똑하고 능력도 좋은지 모르겠다.  그동안 잘 챙겨주던 팀장이 요즘 자꾸 후배들을 눈여겨보는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프로젝트를 새로 맡았으니 파이팅 하라며 응원이라도 해줄 법 하건만 실패하면 진급에서 떨어진다느니 후배에게 추월당한다느니 하며 걱정하는 듯 한 말투로 채근해댔다.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대기업이 뭘 보고 우리와 손을 잡겠는가.  팀장이 자신에게 대기업과의 협력을 이끌어내라는 과제를 맡겼는데 승진에 목을 매는 팀장은 조금이라도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다른 사원에게 일을 넘길 것이 분명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데 영 자신이 없다.  그 일차 결과가 내일 있을 회의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애꿎은 담배만 연신 피워대다 문득 아까 보았던 거울이 생각이 난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기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분명 능력 있고 당당한 임원의 모습이었다.  아들 진태가 들어오는 바람에 더는 보지 못해 아쉬움이 살짝 남은 터라 불이 꺼진 진태의 방을 보고는 창고로 들어간다.  캄캄한 창고의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환해진 창고 안에는 평소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이 한 쪽 벽에 쌓여있고 반대편에는 거울이 걸려 있다.  갑자기 환해진 불빛에 적응을 마친 영환은 거울 앞으로 다가 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정말 볼품이 없다.  어깨 끈이 늘어진 런닝에 후줄그레한 반바지, 운동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 가느다란 다리에 뽈록 튀어나온 배는 전형적인 사무실 꼰대의 그것이다.  누가 봐도 능력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일에 치여 이리저리 떠밀리는 잉여인간의 모습이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에 한없이 실망하다보니 평소 부러워하며 눈여겨보던 소위 잘나가는 임원들과 똘똘한 후배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펴진 어깨, 강인해 보이는 입술, 상대를 압도하는 눈빛, 거리낌 없는 몸짓,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증명하는 탄탄한 몸매.  이렇게 그려보고 저렇게 그리다 보니 왠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그리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 모습으로 내일 만나게 될 대기업 직원들과의 회의에서 좋은 성과를 이끌어 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점심시간.  아이들은 이미 도시락을 해치운 터라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매점으로 몰려간다.  진태도 몇몇 아이들과 매점으로 가려는데 반에서 최상위 지배자라 인정받고 있는 태섭이 다가온다.
- 야, 김 진태.  좀 볼까?
    말을 하는 태섭의 표정은 마치 적수를 눈앞에 둔 장수인양 결연했다.  아마도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학급 내에서 하나뿐인 최상위 권좌를 놓고 한 판 벌일 모양이다.
퍽.  아악.  그것은 순간이었다.  진태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손 안에 지우개를 움켜쥔 채 가운데 손가락을 살짝 삐져나오게 만들고는 태섭의 경동맥을 향해 내질렀다.  순간의 힘으로 경동맥을 가격 당하면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누구도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이를 알 리 없는 진태였지만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고 순식간에 벌어졌다.  
한 방.  그것은 단 한 방이었다.  단 한 방으로 최상위 지배자로 인정받던 태섭은 바닥에 누워 목을 움켜쥐고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그런 태섭을 내려다보고 있는 진태는 비어버린 권자를 차지하게 되었다.
- 나대지마라.  오늘은 이정도로 끝내지만 다음엔 죽을지도 몰라.
    나지막이 경고하는 진태의 목소리에는 가늠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여자 아이 몇몇은 그런 진태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진태는 아이들과 함께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는 태섭을 뒤로 하고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새 소문이 퍼지고 있었는지 다들 진태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맞은 편 끝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며 진태를 부른다.  병수였다.  병수는 먼저 와서 진태 몫이랑 해서 넉넉하게 샀으니 줄 서지 말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한다.  진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래 하고는 자리에 앉아 함께 김밥과 컵라면을 먹는다.  잠시 후 희연이가 바나나 우유를 사들고 와 진태 앞에 놓더니 이내 밖으로 나가 버린다.  함께 있던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반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외모와 시원시원한 성격 거기에 공부도 잘해 남자 아이들은 침만 삼키며 쳐다만 보던 그런 희연이 진태에게 호감을 제대로 표시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거 참.
    진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헛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내심 쿵쾅쿵쾅 울리는 심장 소리를 누가 듣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했다.  희연이나 나를.  진태는 오늘 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의 프러포즈를 받게 된 것이다.  매일이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싶은 진태다.  교실로 돌아온 진태는 제일 먼저 희연에게 다가가 아까 건네준 우유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했다.
- 내일 나랑 영화 보러 갈래?
    느닷없이 훅 들어오는 희연의 데이트 신청.  예상치 못한 공격에 진태는 크게 당황했다.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만은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뛰는 심장 때문에 대답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 으응.  그래.
    가까스로 대답을 해준 진태는 반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이후에 이어지는 수업은 단 한 글자도 눈으로도 귀로도 들어오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내일.  내일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데이트가 있다.  그것도 희연이랑.  진태는 희연이와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 김 과장, 오늘 일 한 번 내보자고.
    대기업 직원들과의 면담 장소로 향하는 영환에게 팀장이 파이팅을 해준다.  출근길에 항상 막히던 도로가 뻥 뚫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나 했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오늘은 멋있어 보이네요하며 아침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매일이 오늘만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코앞에 닥친 면담은 영환을 긴장과 초조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일이 잘 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발걸음마저 경쾌하다.  회의실에 먼저 도착한 영환이 출입문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위치들을 건반 두드리듯이 경쾌하게 터치하자 이내 천장의 형광등들이 앞 다투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치 영환의 손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가끔 꿈뻑꿈뻑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녀석도 있었는데 오늘은 모두 활기가 넘쳐 보였다.

    뒤이어 들어서는 손님들과 함께 가볍게 티타임을 갖고는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영환의 회의 진행 솜씨는 전과 달리 경쾌하면서도 빠르지 않았고, 치밀하면서도 무겁지 않았다.  프리젠테이션하는 내내 상대 팀은 영환과 팀원들의 빨아들일 듯 한 흡입력과 거절할 수 없는 설득력으로 패배를 선언하였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다.  상대 회사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 회의의 목적이었지만 영환의 실력에 취해버린 상대 팀은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 및 지속적인 협력관계까지 약속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영환은 팀원들의 축하는 물론 부장, 사장은 물론 회장 앞에 까지 가서 성과에 대한 치하를 받고 점심까지 거하게 대접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회장이 직접 챙겨 준 금일봉에 다음 달에 있을 정기 인사 때 팀장으로 승진시켜준다는 약속까지 선물로 받아오는 영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하고 즐겁다.  이게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아다오.  영환의 소식에 아내도 기뻐한다.  좋아, 오늘 저녁은 외식이다.


----------  감사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  신비한 거울의 출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