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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30. 2020

신비한 거울 #3

#3  난 이럴 때가 제일 짜릿해

    거울 앞에 선 진태는 거울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세밀하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건 아주 오래 되었다는 것과 세월에 비해 거울이 깨끗하게 비친다는 것뿐이었다.  마법의 거울이라고 하기에는 장난치는 것만 같아 좀 진지하게 거울의 정체에 대해 고민을 해봤지만 진태의 답은 정해져 있다.  이것은 분명 마법의 거울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울을 마주 보고 어떤 장면을 상상하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주는 마법의 거울.  하지만 그냥 이렇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진태는 한 번만 더 시험을 해보기로 한다.  내일 희연과의 데이트에서 희연이 먼저 팔짱을 껴준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마법의 힘이야.  아니, 좀 부족하다.  희연이 자기 볼에 뽀뽀해주는 것 까지 해보자.  그렇게 진태는 고등학교 1학년짜리의 첫 데이트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주문들을 만들어본다.  거울을 바라보고 자신과 희연이 서로 팔짱을 끼고 영화를 보는 모습,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걷는 모습, 갑자기 희연이 자신의 볼에 뽀뽀하는 모습까지 상상을 한다.  진태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상상의 끝이 어디 있을까.  진태 역시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에 빠져 짜릿한 기분을 만끽하면서도 계속 더 강한 자극을 갈구하게 된다.

- 진태야!

    인적 없는 곳에서 희연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진태는 엄마의 갑작스런 호출에 정신이 번쩍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창고 안이었다.  실망과 아쉬움이 뒤섞여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진도가 더 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진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실로 들어서는 진태.  그런데 어제까지와는 달리 대부분의 아이들이 진태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진태는 엉겁결에 같이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잠시 후 태섭이 다가와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좀 보자고 한다.  진태는 무섭게 인상을 쓰며 태섭을 노려봤다.

- 뭐야, 어제 경고했을 텐데 벌써 잊은 거야?

- 그게 아니라, 옆 반 진호가 보자는 거야.

- 진호?  그게 누군데?

- 옆 반 짱.

- 미친 놈.  보고 싶으면 지가 오라고 해.

    태섭은 자신을 노려보는 진태의 눈빛이 너무 매섭고 날카로워 감히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밑으로 내린 채 주춤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아마도 옆 반 진호라는 아이에게 가는 것이리라.

    지겨운 오전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하나 둘 짝지어 매점으로 향한다.  진태도 일어서려는데 문 밖에 처음 보는 아이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진태는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일어난다.  

- 니가 진태냐?  와라.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턱 관절이 뻣뻣한지 연신 좌우로 움직이며 턱관절을 맞추는 듯 하기도 하고 좌우 어깨를 번갈아가며 근육을 풀어주는 듯 한 행동을 하는데 마치 권투 선수가 시합 종을 치면 상대 선수에게 나아갈 때 습관적으로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마도 싸움에 이골이 난 녀석 같았다.  뒤에서 태섭이 진태에게 다가와 쟤가 진호라고 알려 준다.  이미 몸을 틀어 어디론가 향하는 진호의 뒤로 댓 명의 아이들이 뒤따른다.  갈까 말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미 진호와의 조우를 본 아이들의 진태를 향해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태섭을 앞장 세워 진호를 따라간다.  진태는 가는 내내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지도 않았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에서 수없는 그림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거울 앞이 아니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넘어 난감하기까지 한 진태다.  옥상에 도착하니 이미 진호를 비롯한 20여명의 아이들이 반원을 크게 그리고 있었다.  진태가 진호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니 포위된 형국이 되어버렸다.  순간 진태는 혼자라는 생각에 크게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먹 안에 넣을 만한 것을 찾는다.  다행히 작은 지우개가 하나 있다.  진태는 지우개를 손안에 넣고는 주먹에 힘을 주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 했다.

- 어이, 니가 진태냐?

- 그런데, 무슨 일?

    진태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목소리를 낮춰 천천히 대답한다.  그런 진태의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꽤나 당당하게 비춰진다.  그 중 리더 격으로 보이는 아이가 진태에게 호감이 있다는 듯 말을 했다.

- 오, 듣던 것 보다 꽤 쎈데.

- 용건이나 말하지.  매점에 가야해서.

    리더로 보이는 아이가 옆에 몇 몇 아이들에게 속삭이듯이 말을 하는 게 뭔가 의견을 나누는 것 같다.

- 너 우리 모임에 들어올래?

    진호는 자기들 모임이 각 반 짱들의 결사체라는 둥, 앞으로 학교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들이라는 둥 별 같잖은 말들로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진태에게 가입을 권유한다.  한마디로 1학년을 지배할 일진들이라는 말이다.  가입을 안 하면 매일 두세 명씩 찾아가겠다는 협박까지 덧붙였지만 쓸 데 없는 사족일 뿐이다.  진태는 이 상황을 무사히 모면하기만을 간절히 바랐고 또 무리에 합류하면 혼자라는 이유로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터이니 저들의 초청은 결과적으로 진태가 가장 원하던 그림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1학년에서 가장 잘나가는 일진의 일원이 되어버린 진태는 앞으로 모임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원년 멤버인 태섭의 설명을 듣게 된다.  듣다보니 승우가 병수를 괴롭히며 돈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이 태섭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태섭은 병수가 돈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병수와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진호의 귀띔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병수가 중학교 시절 내내 진호의 지갑 역할을 해왔다는 것까지.  그리고 진호가 앞으로 병수의 지갑은 진태의 것이라며 축하선물 주듯 선언해버린다.  병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암시를 주는 것 같았다.

    매점 문을 열고 들어간 진태는 멀리서 병수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는 그리로 가 자리에 앉았다.  

- 어떻게 됐어?  왜 부른 거야?

- 아, 별거 아냐.

- 왜 그런 거야?  말해줘.  궁금하잖아.

- 모임에 가입하래.

- 응?  가입할 거야?  걔들 모임이라는 게 지들끼리 몰려다니며 애들 괴롭히고 돈 뺏는 게 다잖아.  하지마라.  너는 그런거 안 어울려.

    별로 말해주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만 물어오니 귀찮아서 대답했건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같은 병수의 태도가 진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 그래도 진호의 말이 자꾸 귀에서 웅웅 거리며 심난하게 만드는 판에 그 당사자인 병수의 태도는 병수를 대하는 진태의 마음을 바꾸는 빌미가 되어버린다.

- 내가 왜 니 말을 들어야 하지?  나한테 어울리는 건 또 뭔데?

- 아니,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진태의 갑작스런 차가운 말투에 병수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쳐본다.  

- 씨발,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 왜 그래, 갑자기.

- 내가 니 친구야?

    그동안 진태가 자신을 도와주는 마음 좋은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병수는 갑작스레 변한 진태가 낯설게 느껴졌다.  순간 진태에게 배신감마저 든 병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미처 제어하지 못했다.

- 친구 아니었어?

    퍽.  쿠당탕.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태의 발이 병수의 복부를 강타했고 그 충격으로 병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넘어갔다.  

- 하, 내가 니 친구라고.  너 같은 좁밥이랑 내가?  불쌍해서 몇 번 도와줬더니 아주 같은 급으로 만들어버리시네.

    진태는 아직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 누워 있는 병수의 목을 발로 밟았다.  순간 진태는 병수의 목을 밟고 있자니 짜릿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싸는 듯 부르르 떨려옴을 느낀다.  마치 자신이 제왕이 된 것 같은 기분.  적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듯 한 통쾌함.  명령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은 느낌.  평범한 이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우월감.  결코 놓칠 수 없는 이 자리.  놓치는 순간 반대로 누워있는 것은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에 진태는 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아, 지금 이 느낌 너무 좋다.  짜릿해.

    진태는 고개를 반쯤 뒤로 젖힌 상태로 자신의 온 몸에 흐르고 있는 짜릿한 쾌감을 만끽한다.  반면 병수는 자신이 친구라고 믿었던 진태가 이제는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넘어 분노의 감정마저 느꼈지만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눈물을 흘린다.

- 아, 이 병신 새끼 우는 거야?  아놔, 됐다.  그만 하자.

    병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자 순간 마음이 약해진 진태는 목을 짓누르고 있던 발을 떼고는 교실로 돌아간다.  교실로 가는 진태는 병수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것을 다른 아이들이 눈치 채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렇게 진태는 변해가고 있었다.     


    영환이 다음 달에 있을 정기 인사 때 총괄사업부 팀장으로 이미 내정되었더라는 소문은 사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통에 영환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 만큼 흥분 상태가 되어 버렸다.  딱히 친하지도 않은 눈인사 정도만 나누는 사원들까지 멀리서부터 인사를 하니 세상 참 무섭다는 생각마저 절로 든다.  사회 생활이라는 게 결국 힘 있는 놈이 장땡이라는 술자리에서 늘 하던 선배들의 진심어린 푸념이 진리처럼 다가온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입사 동기들을 비롯해 조금이라도 친분을 나누었던 이들이 연달아 축하 전화를 해온다.  벌써 열 통 넘게 전화를 받고 나니 그제야 책상을 맞대고 앉아 있는 팀원들이 축하 인사를 건넨다.  이번 프로젝트에 자신의 승진을 걸고 팀원들을 쪼아대던 팀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영환을 두 팔 벌려 축하의 세레머니를 해준다.  팀의 실적보다는 자신의 실적만을 바라보는 기회주의자이자 능력에 넘치는 자리를 탐내는 권력욕을 가진 팀장의 그런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환이지만 웃으며 답례 인사를 한다.  아마도 팀장은 영환이 총괄사업부 팀장으로 발령 나면 그 위에 있는 자신은 임원으로 발령받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환은 그런 팀장의 바람을 무너뜨려 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팀원들과의 축하 회식이 늦게까지 이어져 거하게 취해서 집에 돌아온 영환은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좋았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음이 좋았다.  자신감이 넘쳐나는 것만 같다.  총괄사업부 팀장이라는 자리는 임원이 되기 위한 바로 전단계가 아닌가.  생각만 해도 짜릿한 성취감이 좋다.  지금까지는 임원이라는 직함에 대해서는 감히 꿈도 꾸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이미지 관리에 실패만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임원이 된다 생각하니 벌써 그리 된 것만 같다.  계속되는 기분 좋은 상상에 영환은 잠이 쉬 오지 않았다.  이제는 자야하는데 하면서도 꼬리를 무는 상상은 끝날 줄 모른다.  담배 한 대 피울 생각에 밖으로 나간 영환은 창고를 무심코 바라보았다.  거울에 대해 의혹이 인 것도 아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욕실로 향하는 것처럼 영환의 발걸음은 창고로 향한다.  창고로 들어간 영환.  거기엔 거울이 하나 달려있다.  오래 되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거울.  영환은 그런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그리고는 조금 전의 그 상상을 꺼내어 이어나간다.  그간 팀장만 되면 꼭 해보리라 다짐했던 일들을 하리라.  영환은 팀장이 되면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신나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하다보니 그것은 아무래도 팀원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할 힘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힘이 생기면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일터 영환 역시 그 힘을 사용하고 싶었다.  누구에게 가장 먼저 사용해야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고, 팀원들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미래를 쉽게 가꾸어 갈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영환은 거울에 팀장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거울에 나타난 팀장의 얼굴을 보자 영환은 갑자기 격해지는 감정을 느꼈고 이내 거울 속의 팀장을 향해 실제 앞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간 팀원들을 어떻게 다루어왔고, 팀원들의 노고를 어떻게 가로챘으며, 상사들에게 꼬리쳐 왔는지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팀장은 그런 자신에게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다.  영환은 십 수 년간 묵혀왔던 팀장으로 인해 뭉친 응어리들을 다 토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계속해 거울 속 팀장을 공격한다.


----------  감사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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