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늦게까지 이어진 축하 회식으로 인해 피곤할 법도 하건만 영환은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 들어서니 마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손님들을 맞이해야 하는 듯 한 기분이 든다. 한 쪽 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등 스위치들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경쾌하게 터치하자 천정에 매달려 있는 형광등이 영환의 앞날을 축하라도 하듯 일제히 불을 환하게 밝힌다.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고는 탕비실로 들어간다. 평소라면 막내 팀원이 모닝커피를 준비하지만 오늘은 왠지 팀원들을 위해 커피를 준비해 주고 싶다. 커피 머신에 물을 붓고 곱게 갈린 커피를 넣고 스위치를 누르니 이내 푸륵푸륵 하며 뜨거운 물이 좁은 관을 통해 커피 위로 떨어지는 소리를 낸다. 새어나오는 수증기가 커피 특유의 구수한 향을 품에 안고서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회사 로고가 박힌 종이컵을 하나 꺼내어 커피를 따르고는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하나 둘 들어온다. 좋은 아침! 영환이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니 직원들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잠시 후 팀장이 들어온다.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프로젝트 덕분에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힘차게 인사를 한다. 영환 역시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간밤에 거울 앞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도 함께 떠오른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팀장이 출세욕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팀원들의 공을 가로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과에 대해선 지나칠 만큼 예민하게 굴었던 것은 자신의 승진에 해를 끼칠까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랬을 뿐. 팀장의 출세욕은 타인을 밝고 올라서는 속성보다는 함께 올라서는 것을 지향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영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거울 앞에서는 왜 그런 상상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 팀장을 향한 이 불쾌함은 뭐란 말인가. 영환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울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팀장도 팀장이거니와 자신 역시 타인을 짓누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팀장을 공격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앞으로 승진이 되면 자신의 힘을 모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누구를 희생의 타깃으로 삼을까 고민하던 모습은 결코 영환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거울이 자신을 조정하기라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영환은 온 몸에 오한이라도 든 양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침부터 진태의 기분이 좋지 않다. 어제 그리 반갑게 인사하던 아이들이 오늘은 슬금슬금 피하는 듯 한 느낌을 여러 번 받았기 때문이다. 반 아이들은 진태가 더 이상 정의의 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아이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태는 이제 승우 대신 반 아이들을 괴롭힐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축축한 옷을 입고 있는 듯 한 찝찝함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 진태는 기분 전환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병수를 부른다.
- 병수야, 우유 하나만 사주라.
병수는 어제의 일로 인해 진태의 말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그런 병수의 태도에 진태는 날 선 목소리로 병수에게 소리를 지른다.
- 야, 내 말 안 들려?
- 우유 사 달라며.
병수 역시 작지 않은 소리로 대답을 하자 진태는 순간적으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우유를 사러 간다는 병수의 말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 끄응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자리에 다시 앉는다. 매점까지 가 우유를 사 온 병수는 말없이 진태의 책상 위에 탁하는 소리가 날만큼 힘을 주어 내려놓는다. 엎드려 있던 진태는 우유 내려놓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우유를 집어 들더니 병수를 쳐다본다.
- 흰 우유네. 난 바나나 우유가 좋은데.
- 무슨 소리야. 니가 언제 바나나 우유 먹었는데.
- 아냐, 나 바나나 우유 좋아해. 가서 좀 바꿔 와라.
진태는 시비라도 걸려는 것인지 평소 찾지도 않던 바나나 우유를 들먹이며 병수에게 다시 바꿔오라고 한다. 병수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지 승우에게는 한 번도 그러지 못했던 반항을 진태에게 부려본다. 병수의 마음 속에 진태는 아직도 자신을 도와준 멋진 진태의 모습이 남아 있었나보다.
- 싫은데. 니가 바꿔다 먹어.
- 아놔, 이게 정말.
하지만 진태는 이미 병수를 도와주었던 그때의 진태가 아니었다. 진태는 이미 또 다른 승우다. 진태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병수를 응징해야겠다 생각한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병수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오른 손으로 뺨을 계속해서 때리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은 그런 진태를 보고도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승우의 자리를 대신할 진태지만 승우와는 질이 다른 진태를 발견하였고 그런 진태를 말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다. 병수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고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진태는 멈추지 않았다. 병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코피와 섞이며 여기저기 튀기 시작하자 진태는 자신의 옷에 묻은 피를 발견하고 나서야 휘두르던 손을 내렸다. 그 잠간의 사이에 진정이 되기라도 했는지 진태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느낀다. 진태가 고개를 돌리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돌리고 고개를 돌려 딴 짓을 하는 척 한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진태는 견딜 수 없는 불쾌감을 더 해 준다.
- 야, 지갑 내놔봐. 내가 가서 사올 라니까.
진태는 이제 병수의 지갑까지 빼앗아 뒷주머니에 꽂고는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매점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아이들의 시선이 견딜 수 없었을 뿐이고 병수의 피 묻은 얼굴이 역겨워졌을 뿐이었다. 진태는 자신이 병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갈 때 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의도치 않은 병수의 지갑까지 빼앗아 나왔던 것이다. 며칠 전 승우를 밟아 놓지 않았더라면 지금 피 묻은 얼굴은 병수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진태는 그렇게 막다른 길로 가고 있다.
양립할 수 없는 성취감과 불쾌감으로 뒤범벅 된 하루를 보낸 영환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창고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게 하는지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하는지 모르는 채 말을 한다.
- 넌 뭐지? 어제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요상한 생각들 니가 한거 맞지?
영환이 무슨 말을 하던 대답이 없다. 거울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으랴. 하지만 영환은 분명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분명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누구도 발견해 낼 수 없는 본인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느낌을 영환은 느꼈다.
- 아빠, 여기서 또 뭐 하세요?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건만 어느새 진태가 들어오며 말을 건넨다.
- 거울 보면서 뭐 하세요? 이거 제 거니까 욕심내지 마세요.
진태는 지난 번에 이어 오늘도 거울 앞에 서 있는 아빠가 불편했다. 혹시라도 거울의 비밀에 대해 눈치라도 채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더 큰 진태다. 오늘은 반드시 거울을 자기 방으로 옮기고야 말겠다 다짐을 한다.
- 자식이, 들어 왔으면 인사부터 할 일이지.
- 아빠하고 부른 게 인사지 다른 게 또 있나요.
- 그래. 근데 이 거울 있잖아.
영환의 입에서 거울이라는 말이 나오자 진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혹시? 설마, 아니겠지 하며 태연한 척 영환과 거울 사이에 선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거울을 떼어 내려 붙잡는다.
- 이건 제 방에 걸어 놓을게요.
- 잠깐만.
영환이 진태의 손을 잡았다. 진태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맞아, 비밀을 눈치채신거야 하는 생각이 들자 진태는 기어이 손에 힘을 주어 거울을 떼어 낸다. 동시에 영환의 손에도 힘이 주어진다.
- 진태야, 잠깐만.
- 아, 왜 이러세요.
영환의 손을 뿌리치려고 거울을 붙잡고 있던 한 손을 빼내자 거울은 기우뚱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쨍그랑. 거울은 힘없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와 함께 영환이 진태를 보호하기 위해 중년의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동작으로 진태를 안고 몸을 돌린다.
- 괜찮니?
진태는 대답을 할 생각은커녕 영환의 걱정 어린 말을 듣지도 못한 채 깨져버린 거울을 쳐다본다. 하지만 바닥에는 깨져있어야 할 거울이란 없었다. 대신 동전들이 가득했다.
- 이게 무슨...
영환과 진태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동전들을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 감사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