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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n 24. 2020

드디어 인터넷을 설치하다

    영주권을 받을 동안만 쌍파울루에서 머물자 생각했는데 웬수같은 코로나 때문에 벌써 네 달째다.  밖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힌 채 자발적 자가격리 모드로 지내다 보니 온 몸이 쑤실 만큼 답답하다.  아이들 역시 한참 뛰어다녀야 할 시기에 집에만 있자니 죽을 맛일 것이다.  소파 위를 뛰어 다니질 않나, 총싸움 한답시고 시계를 깨뜨리질 않나, 벽 짚고 스파이더맨 놀이하다가 떨어져 죽는다고 울지를 않나 정신없다.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아이들을 들고 패면 다소 기분이 나아지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그러지 못하니 많이 힘들 것이다.  아니, 첫째는 동생을 들고 패니 막내만 억울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막내의 운명인 것을 어쩌랴.  다행히 엄마가 집에만 있어도 아무 이상 없는 특이 체질인 것을 축복이라 생각해야지.


    아빠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아이들이 적절한 도움을 주면 좋겠지만 이것들도 눈치는 빤해서 매일 얻어맞을 사고는 치지 않는다.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인심 쓰듯 사고를 쳐준다.  나는 감히 아내에게 엉겨볼 엄두는 내지 못한 채 애꿎은 핸드폰만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댈 뿐이다.  공평하게 열 손가락 모두 사용해서.  그러다보니 데이터 요금이 만만치 않게 나온다.  


    브라질은 한국과 다르기도 하지만 아직 영주권이 나오지 않은데다 쌍파울루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기에 정액제로 사용하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인터넷 설치 역시 영주권이 없으면 신청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 생각도 안했다.  한 주에 두 번 정도 한인 교회에 가서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 아이들 풀어 놓고 데이터 걱정 없이 마음껏 웹 서핑을 즐겼다.  그나마도 네 시간 정도 지나면 눈치 주는 이 없는데도 눈치가 보여 아쉬움에 입맛 다시며 가기 싫다는 아이들 목덜미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지난 주에 종종 만나는 집사님 한 분이 영주권 없어도 인터넷 신청이 가능하다는 기가막힐만큼 유익한 정보를 주었다.  단, 일 년 계약이란다.  집에 와 곰곰이 따져보니 빨라야 연말에나 쌍파울루에서 뜰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 정도면 손해는 아니겠다싶어 얼른 전화기를 들어 우리가 포어(포르투갈어)를 못하니 대신 신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전화가 왔다.

- 알로?

- 알로. 불라 불라...

- ???


    포어도 못하는 내가 뭔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전화기 너머로 뭐라 뭐라 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상대는 몇 마디 하더니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마도 내 어설픈 발음에 포어를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나보다.  다음 날 다시 통화해달라고 부탁하니 우리 아파트에는 설치를 못해준다는 말이었단다.  아놔, 증말.  입에 들어온 떡볶이를 양념만 묻히고 빼앗기는 기분이다.


    다음 날 다시 집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른 통신사를 알아봐줄까 하고 묻는다.  당근 땡큐죠하고 나니 내가 바보가 되어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브라질이라고 통신사가 하나 뿐일까.  왜 다른 통신사에 신청할 생각은 일도 못하고 실망감에 젖어 있었을까.  이 모든 게 코로나 때문이다.  


    코로나로 핑계를 대고나니 조금은 당당해진 나는 그래도 한국처럼 빨리는 안될 거야하며 일주일 이상은 기다릴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어제 신청했을 텐데 오늘 아침에 인터넷을 설치하러 온다면서 집사님이 아침 일찍 문을 두드리시는 게 아닌가.  그때 나는 깊은 수면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새벽 5시 반까지 글을 쓴다고.  그렇다고 많이 쓴 것도 아니면서.  


    얼른 일어나 샤워하고 옷 입어도 부시시한 모습에 벌건 눈으로 비틀대며 나오니 집사님은 아내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사를 하는데 집사님이 다른 곳을 보면서 인사를 한다.  내 몰골에 놀라 시선을 피하나 싶었지만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니 설치 기사가 문 밖에 서 있다.  나 때문이 아니었어.  


    포어를 못하는 나는 뒤로 빠지고 집사님이 불라 불라 유창한 포어 실력으로 몇 마디 나누더니 곧바로 설치에 들어갔다.  잠시 일을 하나 싶었는데 공구가 없다면서 내려갔다 온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이번엔 또 뭐가 없다면서 내려갔다 온다.  네 번을 그렇게 하더니 비밀번호 설정하란다.  비밀번호를 조합해 알려주었더니 핸드폰으로 토도독 몇 번 누른 후 다 되었으니 확인해 보란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오, 신호가 잡힌다.  설치 기사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후 얼른 내보내니 집사님도 가신단다.  배웅하고 본격적으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아내와 나는 핸드폰을 아이들은 노트북을 들고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신호가 안 잡히는 곳은 없는지 확인해보는데 집이 작다보니 그런 곳은 없었다.  기쁨 충만으로 입을 귀에 걸어 놓고는 그동안 데이터 걱정에 아껴가며 사용했던 인터넷을 마음껏 헤집고 돌아다녔다.  인터넷을 설치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일 줄이야.  한국에선 빵빵한 속도에 무제한으로 사용가능하지만 여기 브라질은 그렇지 못하다.  아마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처럼 인터넷 환경이 좋은 곳은 없을 듯 싶다.  허구헌 날 손바닥만 한 핸드폰으로 브런치를 하다 보니 시신경과 함께 짜증신경에도 무리가 갔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으니 너무 기뻤다.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과 만족함을 이곳 브라질에서는 인터넷을 설치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는 남들과 비교하기 바빴는데 여기서는 집에만 있으니 비교할 대상이 없다.  그러다보니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되고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되고 그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 비교하지 않으면 한결 여유로워지고 기쁘고 즐거움이 더할 것이며 감사할 일도 많은 것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인데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 참 많았다.  


    입 안에서 씹히는 삼겹살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잘근잘근 씹어가며 먹는 나는 행복하다.  옆집에서 소고기 냄새가 솔솔 풍겨와도 즐겁다.  옆집에서 먹고 있는 소고기가 투플러스인지 아닌지 무슨 상관이랴.  나는 내 입 안에 있는 돼지 새끼가 더 즐겁다.  그깟 소고기.  난 아프리카에서 돈 없을 때만 소고기 먹었거든.  돈 있을 땐 삼겹살.  푸하하하.  삼겹살을 먹고 있는 지금 나는 돈이 있다는 말이지.  돈이 많다고는 안했으니 오해는 금물.


    작은 것 하나에 즐거워하고 누리는 이 시간, 참 고맙고 아름답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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