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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Aug 09. 2020

긴급재난구조사

나를 나답게 해주는 '도전'

- 사진 :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 장면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고 왜 그런지 알 수도 없지만 집에서 인형 눈이나 붙이는 단순 작업은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할만큼 나의 궁디는 무척이나 가볍다.  그렇다고 일을 아예 못하는 것도 아니건만 직장을 다녀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업무 역시 나에겐 단순 작업에 다름 아니다.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고 남들 안하는 특이한 것들에 매력을 느끼는 나에게 평범한 직장 생활은 그저 창살 없는 감옥일 뿐이다.       


    새로운 환경들을 접하는 것이 좋고 새로운 만남들이 좋다.  그래서인지 유별나게 여행을 좋아한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길 남들이 해보지 않은 일들에 대한 도전 정신이 강하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내주어야 하는데 종종 내가 내미는 별로 아깝지도 않은 작은 것들로 인해 큰 감동이 일기도 한다.  그럴때면 나는 언제나 쑥스러움에 얼굴마저 붉어지곤 한다.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내면이 꽉 차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를 돕는 것이 즐거워졌다.  행복해졌다.  가끔은 눈치없이 오지랖을 부리다가 민망한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다행히 몇 번 안된다


    우연한 기회로 직업에 관한 적성검사를 해봤는데 그때 나온 가장 적합한 직업이 ‘긴급재난구조사’였다.  긴급재난구조사는 세계를 무대로 재난이 발생한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 시급한 조치들을 취하고 현황을 파악하는 선발대를 일컫는다.  필요한 자원들을 선별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취합하여 본부에 제공한다.  본대가 도착하면 뒤로 물러나 본대의 지휘를 따라 일을 하는데 그러다가도 다른 곳에 재난이 생기면 바로 달려가야 하는 전혀 안정되지 못하고 꽤나 위험한 직업이다.  그런데 그런 직업이 가장 적합하다고 하니 남들과 달라야 직성이 풀리는 기이한 성격을 지닌 나로서는 오히려 맘에 쏙 들었다.  나에게 가장 적합한 직업이 ‘긴급재난구조사’라니 참으로 절묘하다.     


    내가 누군가를 돕는 것은 거창한 인류애의 실천이 아니다.  가진 것이 많거나 배운 것이 많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자체가 즐겁고 행복할 뿐이다.  마치 우리네 어머니들이 차려준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에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셨던 것처럼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도 도움의 손길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이들이 있지만 굳이 험지나 오지를 택한 것은 내 능력이 부족한 때문이요, 워낙에 여행을 좋아하는 탓이다.  능력이 특출하다면야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만은 능력이 부족하다보니 남들이 가지 않고 갈 생각도 하지 않는 곳이라야 좀 더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내가 가진 것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요긴하게 사용되어진다면 그것만큼 보람 있는 삶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그곳이 내가 늘 바라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만한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이 아닐까.  오라는 곳이 없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정말이다.


    힘든 이들에게 내민 작은 손길이 그들의 발에 힘을 주고 이내 일어서는 모습을 마주 할 때면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짓기도 한다.  보잘 것 없는 내가 여기에서는 이렇게 큰 힘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은 자만이나 교만이 아닌 겸손함이 되어 자존감을 높여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작은 퍼즐이 되어 한 부분을 감당하게 해준다.     


    2015년 네팔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내 심장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NGO 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하던 그 시간들을 잊을 수 없어 다시 나갈 마음에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있던 때였다.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려 수많은 단체들이 구호작업에 동참하고 있었지만 나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이어지는 구호의 손길보다는 몇 달 후면 그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 텐데 어쩌나하는 걱정이 앞섰다.  시급한 구호작업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겠지만 트라우마와 같은 많은 시간을 요하는 치료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우기는 힘들 것이다.  어느 구호단체도 성과를 외면할 수는 없기에 눈에 띄지 않는 부분들을 배려하기에는 시간과 전문 인력 등의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전문적이진 않지만 나름 오랫동안 상담을 공부하였고 ‘생명의 전화’와 같은 단체에서 수년간 봉사도 했던 터라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정신과 의사들에 비하면 초라하겠지만 그들이 직접 험지에 갈리는 없을 테니 나라도 가서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트라우마 치료에 간단한 의료봉사까지 더하면 좋겠다싶어 1년 과정으로 간호조무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적성검사를 하던 때가 네팔에 가기 위해 심리상담사 자격을 취득하고 이어서 간호조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중이니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하지만 일이 안되려고 했는지 네팔을 가고자 3년간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결국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채 포기해야만 했다.  차비도 얼마 안 드는 가까운 곳이니 한 번 정도는 갈 수도 있었건만 그 한 번도 번번이 무산되니 속이 많이 쓰렸다.  결국 이 길이 아닌게벼 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팔 행을 포기하고 쓰린 속을 달래던 중 아마존에서 초청의 메시지가 왔다.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시는 선교사님을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미 아프리카에서의 경험과 의료 분야의 자격과 경력까지 있으니 마음에 쏙 들었나보다.  아마존에서 NGO를 설립하고 아마존 부족들을 위해 일한지 30년이 되어 가지만 여전히 일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소연을 하신다.  특히 드넓게 펼쳐진 아마존 강을 따라 살아가는 수 많은 부족들을 위해 병원선을 십 수 년째 운행해 왔지만 마땅한 책임자가 없다고.  그로인해 근래 몇 년간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면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 피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선교사님의 간절한 눈빛과 아마존에 대한 환상이 뒤섞이면서 심장 소리가 ‘두근 두근’이 아니라 ‘do it do it’하는 소리로 들렸다.  결국 그날 저녁 가족회의를 통해 다음날 다시 그 선교사님을 만났다.  그리고 온 가족의 만장일치로 아마존 행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작년 2월 말이다.  아이들 다니던 학교, 아내가 다니던 직장, 내가 하던 작은 일들을 모두 뒤로 하고 브라질 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아마존 원주민들의 모습


    어느새 브라질에 온지 일 년이 넘어갔지만  아마존은 근처도 못가봤다.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한 번 가려면 왕복 일주일은 잡아야 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 쉽게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처음 6개월은 브라질리아에서 언어를 공부하였고,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어 쌍파울루에서 지내고 있다.  비자 문제 역시 관할청이 코로나를 이유로 업무를 미루고 있어 마지막 단계만 남겨둔 상태로 대기 중이다.     


    처음 코로나로 인해 발이 묶였을 땐 한 달 남짓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석 달 넉 달 시간이 흐르면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작년에 배웠던 언어는 집에서 뒹굴면서 땅콩 까먹듯 홀라당 까먹었고 집에서 책만 가지고 공부하려니 되지도 않았다.  현지인들과 대화라도 나누어야 말이 좀 늘 텐데 누굴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 부탁하기도 부담스럽다.  다행히 브런치를 만난 덕분에 집중할 곳을 찾았지만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도무지 풀어줄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홈리스들이 코로나로 인한 봉쇄조치로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 막막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간혹 행인들을 위협하기도 한다는 까지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그들을 위해 빵이라도 몇 조각 나누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며칠간은 달랑 계란만 넣은 토스트 4인분을 준비해 나갔다.  그런데 의외로 홈리스들이 많아 준비하는 양이 늘었다.  보름쯤 지나니 토스트와 커피 12인분에 물, 아내가 손수 만든 천마스크들이 매일 밤 그들을 만나러 가는 내 손에 들려졌다.  그들과의 만남이 제법 즐겁기도 했고, 좀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미안함에 눈물 짓기도 했다.  이제는 봉쇄가 많이 풀려 먹을 것이 넉넉해졌는지 들고 나간 빵을 남겨오기 시작했고 결국 125일 만에 나눔을 멈추었다.     


    이제는 정말 집에서만 꼼짝 못하고 지내게 되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이들의 소식이 들려 온다.  도시 곳곳에 퍼져있는 빈민가를 비롯하여 일명 마약촌이라 불리는 곳들.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이들이 모여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혼자는 결코 가지 못할 곳이지만 한인회를 중심으로 이미 활동하는 분들이 있어 아마존에 들어가기 전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생각만으로도 두 발이 의자 밑에서 들썩 거린다.  머릿속에선 이미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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