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하기 힘들고 싫었던 인정, 직면, 응시(1)
내가 생겼어요
아마도 150일쯤 된 거 같아요. 내가 있는 곳은 캄캄해요. 아니 눈을 감고 있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소리는 잘 들리고 있어요.
ㅡ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갑자기 노래가 들리네요. 나를 품고 있는 엄마의 노래 소리에요. 엄마 목소리는 참 맑고 구슬프게 들려요. 엄마는 나를 품고도 쭈그려 앉아 나물을 캐고 있어요. 볼 수 없지만 엄마가 고사리를 캐고 있는 걸 알 수 있어요. 동네아줌마들이 같이 고사리를 캐러 가자고 하는 걸 들었거든요.
ㅡ신안댁, 이제 좀 아 가진 티가 나네
ㅡ네, 애가 가끔 움직이기도 해요.
ㅡ 신안댁 나이가 어떻게 된다 했지?
ㅡ 스물 셋이요.
ㅡ 딱 좋네. 아는 언제 나온대?
ㅡ 8월 중에는 나올 거 같아요.
ㅡ 친구 없어 외롭다가 아 태어나면 정신없을 거구먼.
맞아요. 나는 아직 엄마 뱃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5개월 된 아기에요. 나는 하루에 반은 잠을 자요. 그런데 깨어있을 때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듣고 엄마가 노래하는 소리도 듣고 아빠랑 얘기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ㅡ 3천원...이거 밖에 못 주니까 알아서 써.
ㅡ 왜 이거밖에 안된다요? 애기 기저귀도 끊어 와야 되는데.
ㅡ 그건 얼마나 있어야 되는데?
ㅡ 이불이랑 옷이랑 기저귀랑.. 천원은 있어야 하는데.
ㅡ 모아둔 거 없어? 나물 판 돈 어쨌어?
ㅡ 그건 혹시나 하고 모아두는 건데.
ㅡ 그럼 일단 그거 써. 박소령 새끼한테 가보고 올 테니까.
아빠는 쿵 문을 부술듯이 열더니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ㅡ 아가야 너네 아빠는 맨날 받지도 못하는 돈을 다른 사람들한테 빌려준단다. 바보같이. 그리고 어떻게 월급의 반을 빌려준다니? 너네 아빤 너무 이상해. 아마 화투판에서 돈을 엄청 잃은 거 같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푹 쉬었어요. 그리고 조용히 우는 거 같았어요. 엄마가 울면 나도 기분이 이상해요. 나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데 눈을 깜빡이고 싶어져요.
엄마는 여기에서 신안댁이라고 불려요. 우리 엄마 진짜 이름은 김정심인데요. 우리 엄마가 살던 곳이 전라남도 신안에 어떤 섬이거든요. 그래서 신안댁으로 불린대요.
우리 엄마랑 아빠는 중매 결혼을 해서 서로 얼굴도 모르고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내가 생겨났죠. 엄마는 농사일을 하다가 아빠랑 결혼을 했는데 땅이 없어서 맨날 다른 사람 밭에 가서 일을 해주거나 산으로 나물을 캐러 다녀요. 품삯을 받거나 나물 판 돈은 날 위해서 조금씩 모으고 있는 것 같구요.
5개월 밖에 안된 태아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구요? 나도 몰라요. 그런데 알아요. 아마 나는 아직 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아가라서 그런 거 같아요. 말만 못하는 것 뿐이지 웬만큼은 알아요.
나는 엄마 뱃속에서 눈도 못 뜨고 있지만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어떤 날은 갑자기 잔치국수가 먹고 싶어지기도 해요. 그럼 엄마는 뚝딱뚝딱 애호박을 썰어 넣고 멸치 육수를 내어서 맛있는 잔치국수를 해 먹는답니다. 또 어떤 날은 사과가 먹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아직 사과는 못 먹나 봐요. 달콤새콤한 귤이 먹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귤 역시 엄마는 먹지를 못해요.
엄마는 해산물을 좋아해요. 그런데 여기서는 해산물이 너무 비싸서 먹을 수가 없대요. 그래서 엄마는 식사 때마다 여러 가지 나물을 해서 맛있게 먹고 있어요. 나물을 먹을 때만큼은 외갓집에서 동생들과 밥을 먹었던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시간이 참 빨라요. 벌써 나는 생겨난지 7개월이 넘었어요. 엄마는 요즘 가만히 앉아서 바느질을 많이 해요. 나에게 이필 옷을 만드는 거예요. 옷을 만들 때 나에게 이야기를 많이 해요
ㅡ 우리 아가는 딸일까? 아들일까? 동네 할머니들은 딸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ㅡ 엄마는 너가 태어나면 덜 심심해서 좋을 것 같아.
ㅡ 손가락 다섯 개 발가락 다섯 개 모두 생겼니? 어서 태어나서 만나면 좋겠다.
ㅡ 옆집 아줌마는 첫째 아이를 낳을 때 너무 고생을 했대. 너는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잘 태어나주라.
그럼 나도 뱃속에서 엄마에게 대답을 해요. 물론 엄마에게 들리지는 않지만요.
~ 엄마 난 딸이야. 그래서 고추가 없어. 그래도 괜찮아?
~ 심심하다는 게 뭐야?
~ 내가 눈을 뜰 수 있으면 좋은데 눈이 감겨 있어 서 손가락이 다섯 갠지 발가락이 다섯 갠지 알 수가 없어.
~ 난 지금 엄마 때문에 고생이야. 엄마가 나물 캐느라고 쪼그려 앉아있으면 나는 움직일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어. 엄마 나무 캐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
~ 나도 빨리 나가서 엄마 보고 싶어. 그런데 아빠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무서워. 그리고 엄마한테도 자꾸 나쁜 말을 하니까 아빠는 만나고 싶지 않아. 그래도 만나야 돼?
나는 엄마가 노래를 부르며 산을 올라갈 때까진 좋아요. 그런데 쪼그려 앉으면 내가 놀 수가 없어요. 다리를 뻗을 수도 없어요.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요. 그래서 짜증이 나요.
그래도 나는 아직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아가예요.
이제 7월이라고 해요. 엄마가 많이 더운가 봐요. 한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어요. 나는 엄마가 부쳐질 할 때마다 펄럭펄럭하는 소리가 들려서 재미있어요. 나는 수박이 먹고 싶어요. 그런데 엄마는 수박을 살 수가 없나 봐요.
ㅡ 아가야 엄마가 수박을 사 올 수가 없단다. 아빠가 돈을 조금밖에 안주셔서 아껴 써야 하거든.
ㅡ 아가야 이것봐 예쁘지. 이거 너 태어나면 입힐 거야. 그리고 이건 양말. 이건 너 눕힐 때 쓰려고 만든 요랑 이불. 그리고 기저귀도 준비했다.
ㅡ 베개랑 딸랑이랑 손싸개랑 속싸개 이제 이거만 준비하면 되겠네. 아!! 그만 차~ 엄마 아프잖아~ 후~후~
엄마 목소리는 즐겁기도 했다가 우울하기도 했다가 슬프기도 했다가 걱정스럽기도 해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이렇게 즐거웠다 슬펐다 걱정했다 하는 느낌은 나도 알 수 있어요. 바깥 세상에 태어나면 더 많은 걸 알 수 있겠죠? 엄마처럼 말을 할 줄 알게 되면 더더 많은 걸 엄마에게 물어볼 거예요.
ㅡ 엄마 나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울었거든. 그때 왜 울었어?
ㅡ 엄마 나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수박 먹고 싶어 했는데 왜 못 사 먹었어? 아빠한테 사달라고 하지.
그런데 내가 너무 이상해요. 발을 뻗고 싶은데 발이 뻗어지지 않아요. 이제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내가 밖으로 나가면 과연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도 돼요. 나는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런 일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두렵기도 해요.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어요. 내가 생기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죠. 이런 기분을 느낄 수도 없었겠죠. 그래서 난 나가야겠어요.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야겠어요.
엄마에게 나가고 싶다고 하니 엄마는 배가 아프대요. 나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엄마는 아프대요. 나는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나갈 때 엄마가 아프다면 나는 안 나가는 게 좋겠어요. 그런데 엄마는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대요. 밤에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가면서 나에게 말해요. 언제 태어날거냐고 자꾸 물어봐요. 그래서 나는 또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냥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런데 또 걱정이에요. 아빠라는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대할지. 엄마에게 화도 잘 내고 엄마를 울게 하니까요. 나에게도 화를 내고 나를 울게 할까요? 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은 DNA인가봐요. 궁금한 게 자꾸만 생겨요. 이런 궁금한 것들을 알려면 태어나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