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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근영 Feb 11. 2020

나를 만나는 시간, 찻자리

내 찻자리의 시작

 늙어서 호호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요즘 자주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이제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에 이 일은 평생토록 내 삶 속에 녹아들 수 있는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또는 이미 많고 많은 일들 중에 마음에 드는 일만 남기고 가지치기하거나. 이를테면 이런 일이다. 다듬고 다듬어서 점점 더 정점으로 끌고 가고 싶은 일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의 일종의 정체성이 될 일들.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당연히 내가 하고 있을 일들. 매일매일 하지는 않더라도 절대로 손에서 놓지는 않을 일들. 여행을 한다. 책을 읽는다. 글을 쓴다. 그런 일들이다. 차를 마시는 일도 그중 하나다. 찻자리를 가지는 일.



 나를 찻자리로 인도한 것은 대만에서의 첫 경험이었다. 정확히 하자면 찻자리란 나만의 찻자리, 내가 스스로 마련한 찻자리를 말한다. 사실 그전에도 가족들과 차를 마셔오기는 했다. 녹차, 뽕잎차, 보이차, 국화차 같은. 차에 대한 경험은 어릴 때부터 물방울이 옷깃에 스미듯이 그렇게 내 삶에 녹아 있었다. 하지만 그 희미한 자국들은 나를 명확히 찻자리로 인도하지는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차를 마셨다고 해서 내가 자진해서 차를 찾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대신에, 그 희미한 자국은 나를 찻자리로 이끈 대만의 한 차관으로 나를 인도했다.



 쯔텅루紫藤廬
한국어 발음으로는 자등려로, 자줏빛 등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차관에서의 찻자리가 나만의 첫 찻자리였다. 이 차관을 처음 찾았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이 차관을 찾을 당시 나는 심란한 마음이었다. 처음으로 친오빠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서로 참으로 맞지 않았다. 곧 발령이 나 직장생활에 들어갈 거라는 긴장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떠난 여행이라 그 여행만큼은 꼭 즐거웠으면 했었다. 그래서 ‘늘 혼자’였던 여행에서 벗어나 친오빠와 함께한 것인데, 서로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결국 따로 다니기로 한 참이었다. 즐거워야 할 여행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속상한 마음이어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 동안 그 자리에서, 세월 속에 녹아든 예스러운 건물과 정원의 모습이, 그리고 그 안에서 가졌던 평화로운 찻자리가. 쯔텅루의 정문을 지나 안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그 쯔텅루만의 시간 속으로 조금씩 녹아들었다. 정갈한 공간들을 지나 자리를 잡는 동안, 세월이 깃든 공간만의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 속에서 뾰족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씩 둥글어졌다.



 차를 주문하고 앉아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이런 순간이 나에게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 무언가를 보러 다니고 감탄하는 것도 좋지만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임용고시 합격을 위해 달려오면서 지친 마음과 발령을 앞둔 긴장감이 서서히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혼자만의 것, 내가 바라던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나는 쯔텅루 안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고소하고 청아한 차의 향기, 쌉쌀하면서도 향기로운 차의 맛, 찻주전자에 물을 붓고 15초를 세며 온전히 차에 집중하는 순간, 향기와 맛으로 차를 즐기면서도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순간을 온전히 만끽했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부드러운 공기와 그 속에 섞인 애수 있는 탄현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홀로 내 마음을 돌아보고 나에게 집중했다. 이번 여행은 즐거웠어야 했다는 강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이런 순간을 갖고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주변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저 나만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만의 방, 나만의 공간, 나만의 세계. 내 주변을 굉장히 안락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감싸고 있는 듯한, 양수 속에 포근히 파묻힌 느낌이 들었다. 어딘지 부산스럽더라도 그것은 문밖의 상황일 뿐, 나는 문 안의 고요한 공기에 푹 잠겨있는 것 같았다. 또렷한 정신으로 순간순간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꿈속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애절하게 떨리는 음이 공기 속에 섞여 흐르고, 그 사이사이에 물이 끓고 주전자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떠도는 향기로운 차의 향기, 쫄깃하고 고소한 다과의 맛, 따뜻하고 부드러운 조명, 투명한 차의 빛깔, 몸을 타고 내려가며 뜨끈한 기운을 퍼뜨리는 찻물. 그 순간을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아직도 내 안에 있다.



 그때의 평화로운 순간들을 마음속에 품고 한국에 돌아가서 그 한해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도록 바랐었다. 거센 파도가 치고 폭풍우가 부는 상황에서도 내 마음은 그런 것들에 휩쓸리지 않기를, 고요한 찻자리에서의 순간처럼 내면을 고요하게 유지할 수 있기를. 부디 그 찻자리가 내 마음의 중심에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내 마음이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이후에 발령이 나고, 학교생활을 하고, 결국엔 사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내 마음은 때로는 거친 격랑 속에서 속절없이 흔들렸고, 때로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으며, 때로는 차마 뱉어내지 못한 응어리가 뭉쳐 피멍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 나를 도닥여주고 위로해주는데 나만의 찻자리가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차가 없었더라면 어찌 버텼을까 싶은 순간이 내게 많았다. 너무 힘들 때는 찻자리를 떠나있기도 했지만, 찻자리가 주는 그 평화로움과 고요함으로 늘 다시 돌아왔다. 차를 마시는 일은 그 순간을 즐기는 일이기도 했고, 나의 내면을 마주하고 나를 귀중하게 대접해주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너그럽기보다는 비판적이었던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꼭 필요했다.


 <일본 다도의 마음>이라는 책에 다도와 차를 마시는 일에 대한 다음의 문구가 있다.    


 차를 마시는 것이, 다도라는 것이 별것 아니다. 그 상대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를 귀중하게 대접해주는 것, 조화를 생각하며 오늘의 행복을 이루어가는 것. 여전히 많이 흔들리는 마음이지만 찻자리에서 많이 배우고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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