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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한 Jan 15. 2021

잿빛으로 만들어진 <1917>

롱테이크는 <1917>에 어떤 의미였나.

<1917>에 대해 두 편의 글을 쓴다. 한 편의 영화를 소재로 두 편의 글을 쓰는 건 처음이다. 앞서 올린 글이 영화 코멘터리에 가깝다면, 이번 글을 영화 리뷰에 가깝다. 모두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라고 언급했던 롱테이크는 과연 이 영화에 필요했을까. 그 의문에 따라 글을 쓰게 되었다. 




잘 만든 영화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창작자의 비전과 목표가 잘 통제되고 조율되어 있다. 몇 가지 영화를 떠올려 보자. 직관적으로 읽히지는 않지만 영화관을 나선 이후에도 궁금증과 불온함이 내내 입속과 머릿속을 맴도는 나홍진의 <곡성>과 다소 애매한 위치였던 캡틴 아메리카에게 이후에 펼쳐질 진영 다툼과 개성 강한 히어로들 속 무게 추 역할을 부여했던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처럼 말이다. 좋은 영화는 동공에 새겨져 오랫동안 기억된다. 반면 잘 만들어진 영화는 거기에 투입된 창작자들의 노고를 생각하게 된다. 후자는 ‘만들었다’는 표현에 방점이 찍힌다. 그렇다면 샘 맨데스의 <1917>은 잘 만든 영화일까.    

 

<1917>은 두 명의 병사가 수천 명의 목숨이 달려있는 명령서를 전달하러 가는 영화다. 나무 밑에서 자던 블레이크와 스코필드는 ‘독일군의 함정이니 전진하지 말라’는 명령서를 최전선의 데번셔 2 연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는다. 블레이크는 데번셔 연대에 형이 있기에 임무에 축출되었으며 스코필드는 그저 그를 따라왔다는 이유로 임무에 투입된다. 내일 아침까지 명령서를 전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둘에게는 조명탄 하나 빼고는 무엇도 지원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 둘은 이등병이다! 영화는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 참호 속과 땅 밑, 그리고 평지 위를 단 한 번의 컷 바이 컷 없이 카메라는 이 둘을 쫓아간다.     


한정되어 있는 시간 안에 ‘기-승-전-결’을 갖춘 영화와는 달리 전쟁에는 서사가 없다. 철수와 민수가 시비가 걸려 주먹질을 하는 내용은 10분이나 한 시간 안에 다룰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싸워 무엇 때문에 끝났는지가 분명하다. 하지만 전쟁은 그럴 수 없다. 전쟁의 시작은 사람의 욕망에서 시작되며 끝 또한 사람의 욕망이 사그라질 때 결정된다. 그래서 전쟁을 다룬 그 많은 영화들이 전쟁의 대서사극을 다루는 대신 어느 특정 사건을 선택해 제한된 시간 안에 압축시켜 재현하는 방식을 택했다. <1917> 역시 마찬가지의 전략을 택했다.       


<1917>은 8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두 시간으로 압축시켰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점프되는 순간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스코필드가 독일군 비행사에 죽은 직후에 아군이 근처에서 나타나고 무너진 철교를 건너며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어느덧 하늘은 어두워져 있다. 이름 모를 여인과 영아에게 우유와 식량을 나눠주는 사이 새벽이 오고 물에 빠져 나무에 걸렸을 때는 아침이 와 있다. 8시간 사이 비어 있을 수밖에 없을 시간적 구멍을 모두 메우거나 제거함으로써 다음 내용을 향해 스킵 버튼을 누르듯 영화는 앞으로 나아간다. 


오른쪽이 샘 멘데스 감독, 왼쪽이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이다. 


샘 맨데스는 야망이 큰 감독이다. 동시에 절제되어 있다. 서사에 개입하는 대신 문제를 형상화해서 관객 앞에 진열한다. 최근 무려 영국 신사 첩보물의 대표 <007> 시리즈 두 편을 연달아 맡으며 벌크 업을 했던 그는 <1917>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서 그의 수완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그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거나 일찍이 예상될만한 결말로 관객을 유도하지 않는다. <1917>에서 주인공이 싸우는 대상은 독일군이 아니다. 8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이다. 이런 설정과 연출은 감독의 특별한 장점이다.      


하지만 <1917>에서 샘 맨데스보다 뜨거운 열의를 불태웠던 이가 있으니, 그 이름하여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다. 로저 디킨스는 위대하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지언정, 그가 촬영했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자면 겹겹이 쌓아 올린 페이스트리처럼 수많은 겹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래서 이렇게 넘어가는구나, 배우의 저 표정을 강조하기 위해 위에서 찍었구나 식으로 어느 정도 합리화가 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굳이 <1917>에서 로저 디킨스가 롱테이크 기법을 왜 사용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롱테이크는 첫 스타트에서의 긴장감이나 흥분을 끊지 않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시간에 맞춰 관객의 가쁜 호흡을 유지시킨다. 로저 디킨스가 <1917>에서 목표로 한 것 역시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관객이 아니라 영화 속 두 인물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 영화의 롱테이크 속에서 두 병사의 잡담과 가축 학살 같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다. 무려 롱테이크 속에서! 롱테이크가 비로소 이 영화 속에서 효과적으로 발현되는 장면은 스코필드가 데번셔 2 연대의 매켄지 중위에게 전언을 전달하러 가는 장면이다. 종으로 돌진하는 수많은 병사들을 거슬러 150미터라는 거리를 횡으로 전력 질주하는 스코필드의 모습과 토마스 뉴먼의 스코어 ‘Sixteen Hundred Men’와 함께 비로소 관객 역시 손에 땀을 쥐고 스코필드의 모습을 응원하게 된다.    

<1917>에서 롱테이크가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됐던 장면.

<1917>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전쟁에서 벌어질 법한(그리고 실제 벌어졌던) 상황을 충실히 재현한다. 학살된 가축들, 이데올로기라는 이름 아래 징집되어 죽거나 미쳐버린 젊은이들, 단 몇 백 미터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이어지는 전쟁을 재현하며 이 모든 참상의 기록들을 영상으로 재현하니 다시는 인간의 이러한 우행이 벌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아마도 샘 맨데스의 기획 의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1917>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의 희생이 빛이 아닌 잿빛으로 빛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스코필드는 아린 무어 장군의 명령서를 매켄지 중령에게 무사히 전달하고 블레이크의 형을 만나 동생의 명복을 빌어준 뒤 다시 나무에 기대어 숨을 돌린다. 대다수 관객의 감상도 여기에서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전쟁의 흐름이 그렇게 단순한 걸까. 스코필드가 성취한 것은 천육백 명의 목숨을 건진 것이지 전쟁 그 자체를 종결시킨 것은 아니다. 스코필드는 아침 해를 쬐며 나무에 기대어 있지만 여전히 그는 흙먼지를 덮었쓰고 있다. 샘 맨데스는 매켄지 중령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은 끝날 거란 희망이 있었다. 희망은 위험한 거지. 다음 주면 다른 명령이 내려올 거다. ‘일출과 함께 공격하라’. 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는 거지”  


<1917>은 흥미롭고 빠르며 긴장감이 가득한 어드벤처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 롱테이크라는 거장의 실수가 들어간 것은 치명적이다. 굳이 필요했을까 싶은 과함은 영화를 관객에게는 부담감이다.      


그 부담감을 샘 맨 데스가 덜어준다. 가야만 하는 이유와 그 의지를 이어 짊어지고 가는 어느 젊은이의 지친 뒷모습, 소기의 목적 달성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영화와 달리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쟃빛같은 결말 속에서 우리는 잘 짜인 스토리텔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괜히 이 영화가 다수의 상을 휩쓴 게 아니다. 이 영화는 스토리텔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끝이라 느껴왔던 어느 지점은, 사실 끝이 아니라 정해져 있지 않은 어느 결말로 치닫는 과정 중의 순간일지 모른다. 가끔은 차라리 그것을 끝이라 느끼는 것과 끝이 아닌 중간 단계임을 자각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이로운 것일지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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