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승리호>를 보고 심도 깊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고찰도 아니고, 이 영화의 만듦새나 짜임새를 해체하는 식의 방식도 아니다. 이 영화가 어떤 혹평을 받을 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예상대로 여러 혹평이 쏟아지는 모양새다. 그러나 과연 이 영화가 그런 혹평을 받을 만한 영화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한국영화에 대한 한국 관객들의 평가는 ‘대부분의 경우’ 박하다. 이는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한국 영화계 시스템 전반의 문제도 아니며 해외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사대주의적인 태도 때문 역시 아니다.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수준과 태도가 예전과는 달라져서다. 비슷한 돈을 지불해서라도 더 좋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관객의 지적 욕구가 상승한 탓에 사람들은 영화가 개봉한 직후 영화를 해체하고 타인의 리뷰를 검색해서 읽어본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그것을 대조하며 의식을 공유해나간다.
이는 물론 긍정적인 현상이다. 한 나라의 문화예술을 대하는 비판적인 대중의 태도와 평가는 그 나라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평가의 잣대는 시대상의 거울이 되거나 시의상의 문제점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오랫동안 답습되고 반복되어 왔던 특징이나 태도에 대한 찬사나 비판이 될 수도 있다. 장르란 결국 답습되고 반복되어 온 특징이며 우리는 이를 ‘아메리칸 뉴시네마’ 등의 흐름으로 규정해 학습하고 이해해왔다.
문제는 사소한 특징에 못을 박아 결사코 안 된다고 반대 투쟁을 벌이는 데 있다. 그런 부분에서 신파는 결코 한국 영화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영화에서 신파는 그야말로 지뢰다. 밟는 순간 그 영화의 가치는 절반 이상으로 평가절하 당한다. 최근 몇 년간 개봉했던 한국영화의 새롭고 다양한 시도에도 관객이 신파적 요소라고 느꼈을 때 다른 좋은 점들은 가장자리로 밀려난 채 ‘별로’인 영화가 되어버린 경우가 수두룩하다. <부산행>이 개봉했을 때도 그 이전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은 모두 소거된 채 마지막 장면 하나만으로 ‘신파 묻었다’며 조롱하던 반응이 적지 않았다. 신파는 한국영화 한 편의 수준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다.
이들의 요구조건을 만족시키려면 결국 한국영화는 ‘쿨’하게 시작해 ‘쿨’하게 끝내야 한다. 만듦새나 스토리의 개연성의 탄탄함은 기본이다. 코의 시큰거림이나 눈물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않는 그야말로 건조하고 냉기가 도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러니?’라는 대사나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대사마저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 조건 하에서는 <8월의 크리스마스>마저도 신파 영화다.
<승리호>는 대사의 유치함, 기존 할리우드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주로 사용되던 장면과의 기시감 등으로 혹평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혹평을 받는 것은 강현우가 강꽃님과 재회하며 ‘너무 오래 걸려서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승리호는 설리반이 나노봇을 주입받은 강꽃잎을 납치해 화성을 개척하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이용하다 최소한의 휴머니즘으로 인간은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던 영화였다. 휴머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부모가 납치됐던 아이를 만나 자신의 부주의를 사죄하는 부분마저 신파로 생각하며 영화적인 마이너스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영화를 대하는 비판적인 태도인지 신파에 대한 편집증인지 고민해 볼만한 점이다.
물론 <승리호>가 보이는 허점은 있다. 가령 강꽃잎이 수소폭탄을 싣고 우주 너머 라그랑주로 향하는 승리호를 보호하는 장면은 설정 오류이며 도대체 제자리에 있지 못하는 아이들의 동선은 이야기를 답답하게 만든다.
하지만 승리호 선원 4인의 꾸러기 탐험대 같은 모습과 액션 장면, 황폐화된 지구를 벗어나 우주 쓰레기를 강탈하는데 수십대의 우주선들과 경쟁하는 상황 속에서 강꽃잎이라는 순수함의 발견, 마지막으로 시체라도 찾으려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인류애라는 점에서 <승리호>는 내게 꽤나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이란 이제는 없다. 모방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장착시키고 그 과정에서 잘 짜인 스토리라인과 조율된 기획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 <승리호>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려 노력하는 한국 영화들 중 낯선 장르 속에서 드문 성취를 거둔 영화다. 편집증적인 태도는 시야를 좁게 만든다. 덩달아 문화의 발전 역시 더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