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 그리고 파견 계약직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인생이 잘 풀릴 줄 알았다. 되게 성실하게 살았거든. 선생님과 부모님 말 잘 듣고 주변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열심히 통학하여 개근상 타며 졸업. 이게 소위 어른들이 강조하던 모범적인 삶이 아니었나? 하지만 모범은 어른들이 보기 좋아했던 모습이었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내 모습은 고시원에 얹혀 사는 확찐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영화부 기자가 되어 책을 써 전국에 내 이름과 얼굴을 미디어에 판 대가로 부자가 될 줄만 알았던 20대 중반의 꿈은 철저하게 부서졌다. 국비지원 취업프로그램으로 코딩 공부를 했다가 "감히 문과가 코딩을?" 처절히 실패했고 기자가 되었지만 최저임금도 안되는 돈으로 각종 쌍욕이 들리는 신문사에서 1달을 버티다 때리쳤다. 그리고 근본도 없이 배운 알량한 글솜씨로 방송작가를 노려보다가 그것도 실패했다.
반년 가량을 알바만 하며 집안에서 부모님과 흡사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로 지내다가 문득, 마케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소개팅 성공률과 눈썰미가 75%를 넘겼던 몸이다(정작 지 연애는 못하면서). 무언가의 장점을 어필해 팔아재끼는 데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알바해서 모은 돈 전부를 털어 부트캠프와 컴퓨터를 장만했다. 그리고 수료 2개월만에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9일만에 잘렸다. "준한씨는 역량이 부족해요. 사람들로부터 근태문제에 대한 불만도 들리구요. 미안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치욕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온몸으로 뻗치면서 나는 엉엉 울었다. 광명시에서 인천으로 가는 버스기사님이 퇴근조차 잊고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엉엉 울었다.
한 달간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난 뭘 할 수 있을까? 에라이 그냥 죽어버려야지. 대충 유언장과 얼마 되지 않는 적금을 가족들에게 몇 대 몇으로 분배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찰나에, 내가 공부했던 마케팅 취업부트캠프에서 운영 매니저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합격하자마자 근처에 고시원을 잡았다. 출근까지 2분. 최대한 체력을 안배하면서 일에 있어서는 정말 프로페셔널한 자세를 보이려 노력했다.
2주가 지났다. 나를 담당하던 선임분과 1대1 면담을 했다. 선임분은 내가 여전히 피드백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2달 전 잘릴 때 당시 회사 대표와 면담하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입에는 미소가 있었지만, 마음에는 동요가 일었다. 무서웠다. 또 잘리는 건가? 이렇게 또 잘리는건가?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최선은 모두가 다 한다.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한 번 잘렸던 몸이다. 능력부족과 근태문제. 물론 제대로 된 교육은 없었다. 신입에게 최소 중고신입의 능력을 요구했다. 어쩌면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슬펐지만, 당당했다. 난 그 회사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번 회사에서는 더 좁은 입지로 들어왔다. 집도 근처로 옮겼다. 난 더 해야 한다. 이번이 1차 경고다. 이제 못한다면 진짜 문제다. 손으로 정리하고, 엑셀로도 정리하고, 입으로도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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