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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한 Sep 23. 2020

로버트 패티슨을 좋아하세요?

  <테넷>을 보고 놀랐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세계관의 독창성, 소재의 새로운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나를 놀라게 한 건 한 명의 배우였다. 로버트 패티슨 말이다. ‘미국의 귀여니’ 스테프니 메이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트와일라잇>에서 로버트 패티슨의 특징은 딱 두 개였다. 하나는 새하얀 뱀파이어 피부, 두 번째는 정말 잘생긴 얼굴. 


  뒤집어 말하면 그 둘 이외에는 그에게 장점이란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존재에는 별 불만이 없다). 그랬던 그가 <테넷>에서 여유로운 웃음과 임박한 위험에 대한 빠른 판단력, 날카로움으로 무장하고 나왔으니. 드디어 에드워드 컬렌에서 ‘배우’로 변태 했구나, 놀랄 수 있었던 것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엄청나게 흥행했다. 이 시리즈로 로버트 패티슨은 수많은 영화제에서 최고의 남우주연상과 최악의 남우주연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동시에 로버트 패티슨은 스스로가 배우로서 내리막을 걷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에드워드 컬린으로 이미지가 고정되었고, 피할 수 없었다. 시리즈가 이어지던 중 촬영한 <더 혼티드 에어맨>과 <리틀 애쉬:달리가 사랑한 그림>에서 그의 모습은 에드워드 컬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마 메이크업 담당이 트와일라잇 팬이 아니었을까.      


  물론 시리즈가 지속되는 중에도 다른 작품들에 참여했지만 ‘창백한 피부의 잘생긴 뱀파이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에서는 분량이 워낙 적었고 <더 혼티트 에어맨>과 <리틀 애쉬: 달리가 사랑한 그림>은 메이크업 담당이 트와일라잇 팬이었는지 뱀파이어의 차가운 이미지를 그대로 덧씌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배우가 자신의 리즈시절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든 이유는 배우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탓도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희고 창백한 피부의 잘생긴 뱀파이어 청년이 변화를 꾀했다. 그것도 꽤나 멋있고 성숙해진 모습으로. 이전의 로버트 패티슨이 그냥 커피였다면 최근의 그는 티오피랄까. 우리는 더 이상 에드워드 컬린이 아닌 배우 로버트 패티슨의 이름을 동공 속에 아로새길 수 있게 됐다. 그에 대한 주관적인 애정을 듬뿍 담아, <테넷> 뿐 아니라 새로운 배트맨 역으로 떠오른 로버트 패티슨의 이질적이지만 빼어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정리해보았다. 해당 리스트는 국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OTT 서비스 ‘넷플릭스’와 ‘왓챠 플레이’에서 감상 가능한 영화들로 구성했다.      


1. 리멤버 미 / 앨런 콜터 감독 / 2011년

  수더분한 모습으로 아버지(찰스 로스, 피어스 브로스넌 분)와 척을 지고 사는 타일러를 연기했다. 아버지 회사에 출근하던 날 자살한 형 ‘마이클’을 항상 마음에 품으면서 동시에 여동생 캐롤라인(루비 제 린스)을 무척 아끼는 오빠다. 어느 날 싸움을 말리다 휘말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경찰에게 폭행당한다. 이후 경찰에게 복수하기 위해 경찰의 딸 앨리(에밀리 드 라빈)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지만 그녀를 향한 감정은 복잡해지기만 한다.    

  

  이전의 새하얀 백작 이미지를 탈피하고 피와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 로버트 패티슨의 모습은 익숙함과 동시에 새로움을 제공했다. 특히 아버지와 냉정하게 등을 지면서도, 돌아서선 여동생에게 보여준 따뜻하고 상냥한 오빠의 모습에서 로버트 패티슨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앨리를 향한 달달한 사랑스러운 눈빛은 부가요 소다.       


2. 굿 타임 / 샤프 티 형제 / 2017년 개봉 

  <굿 타임>을 통해 로버트 패티슨의 연기력은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동년 두 개의 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남우주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되었다. 가난으로 겪는 비참함을 탈피하기 위해 코니(로버트 패티슨)는 지적장애 동생 닉(베니 샤프디)과 은행털이를 시행한다. 현금 2만 달러를 훔치는 데 성공하지만 동생은 곧바로 경찰에 잡혀 구치소에 수감되고, 코니는 경찰을 따돌림과 동시에 동생을 구하기 위해 긴박한 시간을 보낸다.     


  로버트 패티슨이 수염을 길렀다. 수염을 길렀다, 라는 표현이 별 의미 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주체가 로버트 패티슨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단지 수염만으로 몇 달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한 달 동안 면도를 하지 못해 피곤함에 찌든 이미지를 보이는 배우는 희귀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과적으로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로버트 패티슨의 동생을 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처절함과 경찰을 따돌리는 과정에서의 와일드함은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점점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3. 더 라이트 하우스 / 로버트 에거스 감독 /2019년

  지금까지의 추천에도 불구, 당신이 끝끝내 로버트 패티슨을 싫어했을지라도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180도 달라질 것이다. 등대에서 근무하는 두 남자의 일상을 그린 <더 라이트 하우스>는 칸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며 국내 팬들에게 알려졌다. 토마스(윌럼 데포 분)와 윈슬로(로버트 패티슨 분)는 등대지기로써 4주 동안 근무를 시작한다. 성격도 다르고 생활 스타일도 다른 둘이지만, 윈슬로가 가장 힘들어하는 건 선임 토마스의 등대지기 업무 독점이다. ‘교대로 등대를 점검하고 지킨다’는 지침서의 규칙을 들이밀지만 토마스의 완강한 거부로 윈슬로는 답답해한다. 힘든 등대 생활 아래 이 둘은 술을 마시며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게 되는데. 이후 윈슬로의 눈 앞에 펼쳐지는 이상한 현상들. 혹시 윈슬로와 토마스는 결국 미쳐버린 걸까, 섬의 비밀을 발견한 것일까. 섬의 괴상한 기류와 거대한 파도가 그들을 잡아 삼키려 한다.      


  확실히 수염이다. 로버트 패티슨의 새로운 이미지의 원천 말이다. 이대로라면 새로운 배트맨에서도 가면 아래 그의 수염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까지 생긴다. <더 라이트 하우스>의 두 남자는 모두 과거를 숨기고 있지만 주요 시점은 로버트 패티슨이 연기하는 윈슬로에서 출발한다. 그가 보여주는 우울은 뱃사람이자 섬사람으로써 겪는 외로움과 고독의 감정이다. 이 감정이 자신의 호기심과 욕구를 억누르고 통제하는 토마스에게 분노하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참다 참다 폭발, 이라는 수식을 90분의 영상으로 배우가 표현하는 건 연기가 아닌 일종의 행위예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4. 하이 라이프 / 클레어 드니 감독 /  2019년

  범죄자들이 탄 우주선이 우주를 표류 중이다. 그들의 목적은 블랙홀의 에너지를 이용해 지구로 무제한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 그러나 지구에서는 이를 범죄자 격리 방법의 일종으로 보고 있으며 그들이 절대로 귀환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한편 우주선에선 과학자 딥스(줄리엣 비노쉬)에 의해 모종의 실험이 진행되고, 통제로 가득 찬 우주선 내부와 결코 나갈 수 없는 우주라는 외부환경에 하나둘씩 정신 줄을 놓아버리는 죄수들. 유일하게 단단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몬테(로버트 패티슨 분) 뿐이다. 어느 날 그의 아이가 딥스의 계획 아래 인공수정으로 탄생하고 해당 돌발상황 아래 몬테는 방황과 결단 사이를 왕복한다.      


  프랑스의 예술적인 영화감독 클레어 드니의 <하이 라이프>는 개봉 당시 평단의 전폭적인 호평을 입었지만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문장을 보고 영화감상을 포기한다면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유전>, <미드 소마>, <문라이트>, <엑스 마키나> 등 마니악한 팬덤을 형성했던 영화의 제작사 ‘A24’의 심리 SF 스릴러 영화이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방출된 죄수가 역으로 지구의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이 영화에서 로버트 패티슨은 쾌락 대신 금욕을 선택하며 자신의 딸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는다. 희망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를 위해 몬테에 빙의하여 영화를 체험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5.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 안토니오 캄포스 감독 / 2020년

  한 아이가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이 순탄하지는 않은 법이다. 이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적부터 주변의 악한 인물들로 인해 인생이 계속 꼬여만 간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강아지가 죽었다. 새 가족이 된 여동생은 매일같이 괴롭힘을 당했다. 아이는 여동생을 지켜야 했다. 그것이 남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여동생은 마을에 새로 온 목사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자살해버린다. 죽은 여동생이 임신 중이었다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 아이는 사내가 되었고 신은 그에게 명령을 내린다. 네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주변의 악을 모두 소탕하라. 사내는 아버지의 유품인 권총을 들고 목사를 찾아간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의 주인공은 톰 홀랜드(아빈 러셀 역)다. 지독하게 인생이 꼬인 아이이자, 사내를 연기한다. 그의 주변에는 악인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주인공을 각성시키는 건 프레스턴 티가딘 목사를 연기한 로버트 패티슨이다. 이전까지 설명했던 그의 캐릭터가 주로 삶이 주는 고독에 찌들어 있었다면 프레스턴 티 가딘 목사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동네 젊은 여성들을 노리는 색정광이다. 로버튼 패티슨은 잘 빠진 양복과 기름질나게 넘긴 헤어스타일, 턱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등장한다. 자신의 잘못을 타인의 망상과 착각으로 치부해버리는 가장 얄미운 캐릭터를 연기한다. 악역을 잘 수행하는 배우가 숙련되는 배우인 경우가 많은데, 이 점에서 로버트 패티슨은 분명 숙련된 배우다.      


  올해 말 또는 내년 초 로버트 패티슨이 '배트맨'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배트맨 영화가 개봉할 예정이다. 로버트 패티슨은 얼마 전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으나 회복 후 다시 촬영장에 복귀했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10여 년 전 창백한 피부와 잘생긴 외모뿐이었던 이가 괴물 같은 배우로 돌아와 무려 배트맨을 연기한다니. 도저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그에게 반가움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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