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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한 Sep 02. 2020

흥행과 부진의 대결

어벤저스:엔드게임의 명, 저스티스 리그의 암

이번 글은 분석이라기보다는 리뷰에 가깝다. 분석은 마지막 세 문단만에 만 나와있다. 물론 만족스럽지는 않다.


오랫동안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절음 발이 가 범인이라던가 주인공이 사실 귀신이었다던가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볼 때, 새로운 영화를 본다는 신선함이 아닌 내가 기억하고 기다리던 내용과 장면을 적절한 타이밍에 마주친다는 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에는 ‘좋아하는’이란 수식은 부족하다. ‘사랑하는’이란 수식이 충분하다.


그러나 모두가 사랑하는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건 스필버그의 쌍둥이 형제, 크리스토퍼 놀란의 아버지, 무덤에서 깨어난 스탠리 큐브릭이 각자의 장점만을 긁어모아 영화를 만든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미워하는 영화도 존재할 수 없다. 거의 테러 급 혹평을 받았던 심형래 감독의 <디 워>도 나는 꽤 재밌게 봤다. 아무리 못 만든 영화라도 대중들에게서 미움받지는 않는다. 조롱받고 손가락질당하며 ‘에이 무슨 그런 걸 봤냐며’ 비웃음을 받는 게 더 합리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것 또한 영화가 오랫동안 기억되는 방식이다.


“I am iron man.” 토니 스타크가 핑거스냅 직전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시킨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가상과 허구의 세계관이지만, 우리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닌 어벤저스의 일원인 천재이자 갑부인 토니 스타크가 사망했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어벤저스:엔드게임>은 그런 영화였다. 수십 년간 축적된 마블 코믹스라는 탄탄한 바탕 위에 잘 빠진 코스튬을 입힌 배우들을 캐스팅해 마치 실제 존재하는 인물처럼 설정하여 각각의 기둥으로 세우고 그들을 하나의 스크린인 벽으로 불러 모아 잘 짜인 동선(도면) 아래 그들의 협력과 갈등을 재료 삼아 지붕을 얹었다. 튼튼한 대지에 정확한 설계도를 따라 좋은 재료로 세우고 쌓은 건물은 잘 무너지지 않는다. 거기에 외형까지 아름답고 멋지다면 시민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마블 코믹스를 보지 않았음에도 마블 영화를 재밌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관객이 천만 명 이상이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We save martha.” 슈퍼맨이 배트맨과 갈등 끝에 손을 잡고 원더우먼과 지구를 지켰다. 그 후 1년 뒤 배트맨이 연합을 결성해 지구를 지킨 게 3년 전 일이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잊으려 한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슈퍼맨이 엄마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배트맨이 싸움을 그만둔 건 사실 꽤 말이 되는 설정이었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싫어했던 건 그가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일에 끼어들고 신처럼 굴었기 때문이며, 신의 능력은 쉽게 악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너도 결국 사람이구나”라는 실감에 이르렀기에 배트맨은 슈퍼맨을 없애버릴 논리를 잃었고 싸움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남은 건 ‘우리 둘 다 엄마 이름이 같아서’ 살렸다는 일부 네티즌과 유튜버들의 리뷰와 그에 공감한 구독자들의 조롱뿐이었다.


사실 <저스티스 리그>는 꽤 준수한 영화였다. <어벤저스:엔드게임>은 위기를 던져 놓고 같은 세계관에서 각자 출연하던 캐릭터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위기를 극복했다. <저스티스 리그>는 세상에 능력을 숨긴 자들이 있고 그들은 각자 행동하길 원하지만 지나치게 강한 적 앞에 결국 함께 싸우는 내용이었다. 당위성은 두 코믹스 원작 영화 모두 충분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역시 매력 있다. 혹자는 <저스티스 리그>의 ‘플래시’가 빛의 속도로 뛰어가는 장면을 마블의 ‘퀵실버’와 빗대어 조롱하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까지 조롱받을 일인가 싶다. 그 외의 배트맨의 히어로 랜딩과 그의 턱을 일종의 ‘밈’으로 삼는 것 역시 <저스티스 리그> 흥행 부진의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잭 스나이더는 억울할 권리가 있다.


<배트맨 대 슈퍼맨>과 <저스티스 리그>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 중 첫 번째는 관객에게 스토리를 납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감독을 맡았던 잭 스나이더 감독의 특징과도 연결된다. 영화 내내 리더로서 동맹을 이끌어왔던 배트맨이 막상 스테판울프의 본진에선 원더우먼에게 전시작적권을 넘기는 모습을 보자. 과연 이들은 무엇으로 뭉쳤단 말인가. 잭 스나이더는 <맨 오브 스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에서 화려한 외면 아래 스토리의 부실함을 숨겼다. 마이클 베이 식으로 사방에서 터지는 장면을 모두 찍어 놓은 후 거기에 캐릭터들을 합성한 것과 다르지 않다.


반면 <어벤저스:엔드게임>까지 다른 캐릭터들이 캡틴 아메리카를 리더로 인정했던 이유는 그가 80년 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있던 미국의 국민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리더십은 다른 히어로들을 이끄는 것이 아닌, 히어로들이 자발적으로 그와 함께 하게끔 만든다. 여기에는 비전이 있다. 오래된 국민 영웅의 지휘 아래 조국을 수호하고 수호 끝에 그는 전선에서 은퇴한다는 비전 말이다. 잘 짜인 스토리 아래 나타난 결과물이다.


두 번째 흥행실패의 이유는 <배트맨 대 슈퍼맨> 상영 직후의 조롱과 야유를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DC의 책임이라고 몰기에는 무리가 있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살렸던 이유에 대한 적절하지 못했던 설명, 시종일관 어두운 배경에서 펼쳐져 파악하는데 애먹었던 액션신, 렉스 루터가 ‘하늘에서 그분이 온다’며 예견했지만 스테판울프가 등장하는 장면은 본편에 조금도 나오지 못했던 점 등 편집 과정이 불친절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잭 스나이더는 차라리 그 장면들을 더 추가해 ‘감독판’으로라도 재출시를 했었어야 했다.


DC코믹스의 표면상 특징은 명백한 선과 악의 분리다. <저스티스 리그> 캐릭터들의 능력은 화려하지만 잭 스나이더는 그들이 이 능력으로 어떤 회의감과 혼란을 느끼는지를 언급하지 않거나 대충 얼버무리며 지나간다. 그리고 단지 악을 해치우기 위해 싸울 뿐이다. 이는 과거 가상의 선과 악을 나눴던 매카시즘이 지배했던 미국 사회에서 흥행했을지 모르지만 다양한 가치가 논의되는 현대에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요소다.


힘의 균형 역시 문제다. 사실 이는 <어벤저스:엔드게임> 이전까지 마블 팬들 역시 우려했던 점이다. 리더 격인 캡틴 아메리카는 고작 약물로 강화된 신체와 지구 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진 방패뿐인 인간이었다. 즉, 과거의 영웅이다. 시리즈가 거듭할수록 아이언맨 슈트는 우주에서도 작동될 정도로 진보하며, 토르는 애초부터 번개의 신이다. 스칼렛 위치와 캡틴 마블 역시 힘의 원천이 인피니트 스톤(원작에서는 인피니트 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역시 <어벤저스:엔드게임>에서 묠니르를 들게 된 캡틴 아메리카의 각성은 관객이 그가 어벤저스의 리더이자 “어쎔블”을 외칠 자격이 있음을 납득시켰다.


그러나 <저스티스 리그>에는 이러한 힘의 불균형을 극복하려는 극적인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쿠아맨, 플래시, 원더우먼, 싸이보그와 함께 스테판울프를 상대하던 브루스 웨인은 그들 힘의 한계를 깨닫고 슈퍼맨을 부활시킨다. 아쉬운 건 모든 기억을 잃은 슈퍼맨을 설득시키고 저스티스 리그에 가입시키려는 설득과 노력 대신 그를 힘으로 굴종시키려는 시도와, 모든 무력이 소용없어지자 겨우 선택한 것이 로이스 레인을 데려와 슈퍼맨에게 사랑의 전기충격을 가하는 장면이다. 격투 끝에도 배트맨은 병풍처럼 보이고 슈퍼맨을 설득시키는데 왜 처음부터 로이스 레인을 이용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사소한 것들이 지난 <배트맨 대 슈퍼맨>의 조롱에 힘입어 흥행을 위해 관객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어벤저스:엔드게임>은 국내에서만 1400만 명을 동원하며 ‘천만 영화 멤버십’에 가입했고, <저스티스 리그>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조롱을 벗지 못한 채 약 180만 명에 그쳤다. 물론 마블의 영화 역시 부침이 없지는 않았다. <아이언맨 2>, <토르>, <캡틴 아메리카> 역시 국내에서 흥행하지 못하거나 애매한 징검다리라는 혹평을 들었으며 특히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감독이었던 조스 웨던은 흥행 참사의 책임으로 해고당해야만 했다.


결국 누가 더 부침에서 빨리 헤어 나올 수 있느냐의 승부에서 승리한 건 마블이었다. DC가 마블의 성공 공식을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졌음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실패의 요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악명을 벗어던지려는 시도에 있었다. 마블은 꾸준히 캐릭터성을 앞세워 자사의 영화 및 캐릭터에 대한 호감을 올렸던 반면 DC의 시도는 마블의 그것보다 적었다.


입소문은 이제 S-소문이라 명칭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소문은 더 이상 입으로 퍼지지 않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된다. 영화 제작사의 입장에서나 수입사 및 배급사의 입장에서 소셜미디어를 결코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영화 개봉 사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정적이 이미지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DC의 패착이 자신들의 자멸을 이끌었다.


마블은 자신들이 쌓아온 토대 위에 가장 인지도 높은 캐릭터 두 명을 퇴장시켰다. 이것이 마블의 차기작에 이익이 될지, 악수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페이즈 4에서 살아남은 캐릭터들, 이를테면 캡틴 마블과 스파이더맨, 토르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이라는 탄환이 남은 상황에서 그들의 새 판 짜기가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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