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년 전 이루마의 콘서트장. 스물여덟의 나는 생각보다 조금 다른 듯한 피아노 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곡을 듣는다. 현장에서 들으면 더 아름다울 것 같았던 피아노 곡이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다. 연주가 다 끝나고 이루마는 관객들에게 여러 가지 공사다마를 말하며, 연주하면서 두 번 정도 틀렸다고 솔직하게 겸연쩍은 듯 웃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속으로 이 표가 얼마짜린데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 싶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작곡이란 자신의 미숙함을 견디고 견디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심상을 결국을 하나의 완벽한 곡으로 표현하는 과정이고, 그런 솔직함과 자신에 대한 관대함이 있기에 그는 피아니스트이면서 동시에 작곡가로 그렇게 많은 명곡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난 기계가 재생하는 완벽하게 연주된 피아노곡이 아닌, 인간 이루마가 현장에서 영혼을 담아 표현한 피아노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곳에 갔던 것이다.
여러번 맞춤법 검사를 하고 발행한 첫 글에 오타, 비문, 오문이 눈에 띈다. 몇 개를 수정하고도 고치기 난감한 비문이 남는다. 다시 수정하려고 키보드를 만지작하다가 무언가 사위가 편안해진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창을 봤다. 새벽 6시 21분. 가로등이 꺼지는 시간. 하늘로 맥락없이 뻗은 나무가지 사이로 점점 옅었던 코발트색 짙어간다. 어슴프레 한쪽 귀퉁이에서 오렌지 빛이 번져가자 새벽의 공기를 데울 해가 저 뒤 어디선가에서 올라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인공빛이 꺼지자 나무는 이제야 편안히 쉬는 듯 하다. 그렇게 새벽과 아침은 6시 21분을 기준으로 나뉘어진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를 영화화한 <네버 렛 미 고>
SF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앙상블을 보여준 '나를 보내지마'. 인간의 대체품으로 쓰이는 복제인간이 어린시절 학교로 찾아오던 미스터리한 회색정장의 그녀를 찾아가는 과정과 결국 그들이 마주한 무자비한 현실, 그 벽에서 체념과 어떤 희망 사이의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날카로운 시선과 문장으로 풀어냈다.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라는 주인공의 질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대답보다는 교육적인 가르침으로 일관하는 교장은 결국 장식장을 옮길 사람이 오자 부랴부랴 수선을 떨며 자리를 뜬다. '너는 마음을 읽을 줄 아는구나'라는 더 차가워 보이던 회색정장 여자의 말이 결국 더 인간적으로 들리는 차가운 세상의 벽에 그래도 해피엔딩을 찾으려 책장이 넘어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커뮤니케이션의 70~80%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학계의 정설이 있는 만큼, 언어적 메시지가 없어도, 아니면 메시지가 있어도 그 메시지가 던지는 숨겨진 답을 찾아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은 인간이 태고적으로 가지고 있던 능력이고, 현재사회에도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다만, 온라인 미디어, 텔레비전 등 영상 미디어의 발달로 인간 간의 직접적인 교류보다 매체에 의존한 커뮤니케이션이 증가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능력인지 모른다. 여러 몸짓과 눈빛, 그리고 다양한 비언어 신호를 사용해 우리의 대화는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음에도 우리는 서로간의 대화보다는 휴대폰과 텔레비전, 그마저도 없을 때는 라디오(오디오)를 튼다.
많은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트리거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직접적인 메시지 형태보다는 하나의 신호로 주위에 존재할 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에서 지구는 흡사 살아있는 생명이다. 자신의 생각을 이상기후로, 지진으로, 용암으로 표현하는. 그의 은유적인 표현에서 웃음이 터지다가도 세계 뉴스를 보다보면, 지금의 세상과 그리 다른 미래세계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지구는 이르게 피는 꽃으로, 이상기후로, 악취로,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언가로 지구의 위기를 표현한다.
혹자는 말한다. 인간이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인간은 자연과 외따로이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과 우리, 모두가 공존하는 그 어딘가의 접점은 벌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딘가이며 고민과 통찰로 도달해야할 지점이다. 다행이라면 기술의 발달로 곳곳에서 그 접점을 일부나마 구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상기후가 계속되는 지구에서 아직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는 어딘가의 접점에 다다르지 못했으며, 그 접점은 있다고 믿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이상적인 공간일 따름이다.
폐렴으로 죽어가면서 완성한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이 200년 가까운 시대의 강을 건너서도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스모그'를 발생시키던 공장의 매연이 아니라 자연과 동화된 삶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어떤 이상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일찍 저자는 죽었고, 의학의 발달로 최근에는 비교적 쉽게 고칠 수 있는 폐렴으로 45세의 나이에 죽은 그의 생애는 아이러니하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보여준 헨리 데이빗 소로도, '나를 보내지마'에서 영혼이 있는지 끊임 없이 증명해야 했던 주인공도 과거에는 그 싸움에서 졌는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둘 다 지던가, 둘 다 이기던가 그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대자연의 일부라는 것은 불변의 전제이며, 여기서 변수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 밖에 없다. 우리가 가고 있는 미래의 끝이 새드엔딩이던 해피엔딩이던 우리는 해피엔딩을 바랄 뿐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우리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선험적으로 지금의 기후위기를 풀어나갈 청사진을 벌써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이다.
"Somethings are never done...we do not forget those whom we have loved. We connot forget th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