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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얼 Sep 05. 2024

29_낮술 예찬



술을 좋아한다. 아니지.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술자리를 좋아한다, 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때로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때로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즐기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체념할 때 주고받는 술잔에 분명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은 늘어나고, 슬픔은 줄어들고, 분노는 사그라들고, 체념은 용기로 바꿔주는 신비로운 능력.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아무런 감흥 없이 무료하게 술잔만 기울이다 끝나는 술자리도 분명 있다. 예를 들면 회사 다닐 때 종종 가졌던 클라이언트와의 술자리―쉽게 말해 을의 입장에서 갑과 함께 하는 술자리―같은 것.


술자리가 기분 좋고 즐거우려면 함께 하는 사람, 나누는 대화, 만나는 장소, 마시는 주종과 곁들이는 음식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겠지만, 이런 조건과 상관없이 내가 기본적으로 기분 좋아지는 술자리가 있다. 그건 바로 낮에 하는 술자리, 낮술을 마실 때이다. 그것도 주말이나 휴일이 아닌 평일에 하는 낮술! 어둑어둑해지는 오후 늦은 시간보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그래서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을 때 “와, 아직 환하다!”라고 느낄 때 기분이―대체로 상당히―좋다.


낮에 갖는 술자리가 왜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몇 가지 나름대로 그럴싸한 이유를 찾아냈다. 우선, 베짱이 심보가 큰 것 같다.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평일 낮 시간은 좋든 싫든 열심히 업무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술은 업무를 모두 마치고 저녁에 마시는 게 보통이다. 평일에 낮술을 한다는 건 이러한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경험이라 할 수 있고, 쉽게 말해 남들 고생할 때 나는 편하게 쉰다는 느낌을 극대화하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땡볕에서 개미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그늘에서 기타 줄을 퉁기며 노래를 흥얼거렸던 베짱이가 느꼈던 감정처럼.(베짱이가 맞이한 최후는 고려하지 말자)


또 다른 이유는, 낮 시간이 주는 자기 조절의 느낌이다. 하루가 마무리될 때, 밤이 점점 깊어갈 때 술을 마시면 아무래도 오늘은 이대로 끝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어질 수밖에 없어지고,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취기에 몸을 맡겨 버리게 된다. 보통 이러다 인사불성 취하게 된다. 하지만 사방이 환한 대낮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다른 말로, 이대로 끝나면 아쉽다는 생각에―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정신을 다잡게 된다. 개인적으로 같은 양의 술을 마셔도 낮에 마시면 밤보다 덜 취하는 느낌인데,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낮술을 좋아하는 마지막 이유는, 이건 낮술이 낮술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전제가 되어야 하는 건데, 낮에 시작하면 무엇보다 여유 있게 오래 술자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실 수 있어서는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더 길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앞서 말했던 신비로운 술자리의 효과를 보다 오래 체험할 수도 있고 말이다. 이런 이유라면 밤에 시작해도 늦게까지(쉽게 말해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시간이라도 낮부터 시작해 밤까지 마시는 것과 밤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마시는 건 분명 차이가 있다. 밤과 새벽 시간에는 아무래도 기분이 차분해지고 사고는 더욱 깊은 곳으로 침잠하게 된다. 이로 인해 대화의 주제도 무겁고 진지해질 가능성이 다분해진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와 대화가 꼭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술자리에서는 편안하고 산뜻하게 유쾌하고도 가벼운 분위기를 즐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보통 낮에 술을 마실 때 더 쉽게 형성되곤 한다.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평일 낮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낮술을 즐길 가능성도 당연히 높아졌다. 그래서 난 자연스레 원할 때마다 자유롭게 낮술을 즐기는 내 모습을 기대했다. 점심시간이 지나 한적한 유명 맛집에서 좋아하는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꿈꿨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대만큼 자주 낮술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알고 지낸 사람들은 대부분 평일 낮에 일하는 사람들이고, 어쨌든 나도 아무리 낮 시간이 여유로워졌다지만 작가이자 출판인으로서 마냥 놀고먹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후 몇 번의 낮술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당연히 좋았고 행복했다. 이게 프리랜서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구나 싶었다.


기대보단 뜸하지만 어쨌든 일반 직장인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낮술 기회가 분명 많이 늘었다. 이것 또한 전업작가 생활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낮술을 더 자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행복인가. 비록 불안과 의심, 걱정의 끝없는 연속이 전업작가 생활이지만, 이렇게 행복한 순간 또한 전업작가 생활의 작지만 소중한 일부이다. 



_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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