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어느 정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야구를 정말 좋아한다는, 아니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잘하나 못하나 한결같은 트윈스의 팬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초등학교 2학년 코흘리개 시절부터 30년이 훌쩍 넘도록 야구를 좋아하고 한 팀만을 응원하고 있으니, 이 정도 순애보면 어디 가서 남부럽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은 된다고 자부한다. 만약 내 삶에서 야구가 사라진다면 분명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커다랗고 막막한 구멍이 뚫릴 것이다.
어렸을 적엔 야구를 깊이 이해하고 좋아했다기보다는 그저 단순하게 경기의 승패만을 즐겼던 것 같다. 이기면 기뻤고, 지면 화가 났다. 90년대는 트윈스가 야구를 곧잘 하던 시기였고, 성적도 상위권이었으니 야구를 보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트윈스는 갑자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로 10년간 하위권을 맴돌며 긴 암흑기에 머물러 있었다.(이 시기엔 야구를 정말이지 너무 못했다!) 만약 이 시기에도 내가 단순히 승패에만 집중했다면 야구를 향한, 또는 트윈스를 향한 애정은 분명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난 트윈스가 경기에 패해도 화를 내기보다는(물론 화를 아예 안 냈다는 건 아니다) 다음 경기엔 이기겠지, 하위권으로 시즌이 끝나도 다음 시즌엔 더 잘하겠지, 라는 편안한 마음으로 야구를 계속 봤다.
욕심을 내려놓았다거나 자포자기의 심정 같은 건 아니었다. 야구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 건 야구를 오랫동안 꾸준히 보고 좋아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경기의 승패보다는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지는 본질적인 특수성을 더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특수성은 바로 야구가 반복과 연속의 스포츠라는 점이다. 야구 경기는 팀 간 전력 차와 상관없이 공격과 수비의 기회가 기본적으로 9회까지 동등하게 주어진다. 공격이든 수비든 한 번 실패했다고 끝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 내에서 도전을 반복할 수 있다. 반복되는 도전이 실패와 성공으로 치열하게 결정되고, 그러한 결과가 누적되어 승패가 갈리는 게 야구 경기이다.
야구 시즌은 그 어떤 스포츠보다 길다. 1년에 6개월 이상 이어지며, 이 기간에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경기가 열려 팀당 총 144경기를 치른다. 비유하자면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달리기이고, 속도전이 아닌 지구전이다. 아무리 잘하는 팀도 길고 긴 한 시즌을 치르면 확률적으로 10경기 중 4경기는 패하고, 반대로 제일 못하는 팀도 4경기는 이기는 게 야구다. 그렇기에 한 경기 한 경기의 승패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한 시즌을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크지 않은 전력차를 가진 팀들 사이에서 연속되는 야구의 시간을 어떻게 더 끝까지 잘 버티고 전략적으로 대처하느냐이다.
이처럼 반복과 연속이라는 특수성은 어느 순간부터 마치 야구가 인생에 주는 교훈처럼 여겨졌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한 번 패배했다고 끝이 아니라 시간은 길고 도전의 기회는 다시 온다는 것.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고 간혹 부침이 있을 수 있지만 긴 시간 꾸준히 최선을 다해 버티다 보면 마지막엔 분명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것. 그 유명한 야구 격언처럼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Yogi Berra, 1973), 인생도 분명 그렇다는 걸 야구는 알려 주었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팀 오클랜드 어슬래틱스의 전설적인 단장 빌리 빈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머니볼>(2011)에서 주인공 빌리 빈은 영화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How can you not get romantic about baseball?)” 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천차만별일 것이다. 내가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야구가 기회와 도전, 그리고 꾸준한 노력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나의 삶도 바뀔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야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믿음을 전해주고 있다. 반복되는 실패 뒤에 반드시 성공의 기회가 올 거라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막막한 시간이지만 언젠가는 분명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를 거라고. 그때까지 시즌은 끊이지 않고 항상 내 곁에 함께 할 거라고.
이러니 어찌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_2024.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