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어떤 내용을 비주얼적으로 풀어내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의 일이기도 하다. 디자인을 할 때면 끊임없이 우선순위를 세우는 고민을 한다. 주어진 내용에서 클라이언트는 무엇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모든 내용이 중요하지만, 모두 강조해 버리면 결국 아무것도 강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어떤 것은 색을 죽여야 하고 크기를 줄여야 한다. 그동안 일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고민해 온 거라 이 고민이 내 일의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친구와 여행 계획을 짜던 때였다. 우리는 제주도 여행계획을 짜고 있었고, 가고 싶은 곳들의 리스트를 적은 후 날짜별로 분류하고 있었다. 내가 아이폰 메모장에 그걸 옮겨적고 있었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말없이 자신의 일을 다하고 있었는데, 친구는 계속해서 리스트에 더 채울 곳을 찾고 있었고, 나는... 리스트 제목에 들어갈 이모티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왜냐면 한눈에 봤을 때 각 날짜별로 먹는 곳, 걷는 곳, 사는 곳 리스트가 직관적으로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 리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각 항목의 제목이다. 그러려면 각 항목별 제목의 크기를 키워야 하고, 그 제목 옆의 이모티콘이 한눈에 구분이 되어야 한다. 일단 색깔 조합이 중요하다. 뚜렷이 구분되면서도 촌스럽지 않아야 한다. 조금 더 욕심내자면 이모티콘에 의미가 담겼으면 좋겠다. 그저 색깔 때문에 선택된 이모티콘이 아니라 먹는 곳의 의미를 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머리에서 쥐가 나도록 이리저리 조합하고 있었다. 잘 정리하고 있냐는 친구의 물음에 갑작스럽게 고민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모티콘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나를 말이다.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직업병이라는 것을.
이 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이 중요할까. 그리고 무엇이 덜 중요할까. 클라이언트는 이 디자인을 통해 어떤 결과를 원하는 것일까. 소비자 입장에서는 무슨 내용을 가장 알고 싶을까. 나는 그저 포토샵을 켜고 화려한 색과 그림으로 내용에 맞게 배치하고 비주얼화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 활동과 같은 비중으로 우선순위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 나는 내 삶을 두고도 이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라 영향을 받은 지도 모르겠다. 대학생 때는 시간과 체력이 남아돌았는데, 직장인이 되니 둘 다 없어졌다. 처음에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아니면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니 시간은 무섭도록 흘러가고 있었고, 기분대로 되는대로 시간을 쓰던 나는 의미 없음과 마주했다.
내 한정된 시간과 체력이 쓰이는 곳은 그저 웹툰의 한 장면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그 장면들이 모여 내 인생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곧 인생이기도 한 것이다. 그때부터 선택과 집중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모든 사람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정작 가까운 사람에게는 소홀하다. 사람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그런 것 같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오래된 친구들과의 약속이 줄어들었다. 또 덜 친한 사람들과 만나 기력을 다 소진하게 되는 날이면, 집에 돌아와 가족에게 아까만큼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 남의 말은 그렇게 잘 들어주고 리액션해주면서, 가족에게는 그렇게 못해주는 것이다. 가끔씩은 그럴 수 있겠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계속되면 이 시간이 쌓인 만큼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불필요해 보이는 약속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들을 실망시키더라도 말이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지도 돌아봤다. 하고 있는 활동 중 시간을 늘려야 할 것이 뭔지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레 삶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를 알아가는 것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나,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럼 무엇에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나를 모르고 쓸데없는데 시간을 쏟고 있었을 것이다. 인터넷이나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과 같다. 인생을 그렇게 끌려다녔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누를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하는 과정도 어렵고,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한 마음도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강조되면 정작 결과물의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선순위 없이 모든 것에 힘을 쏟다 보면 인생의 끝자락에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