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번아웃을 경험했던 2017년부터 <금일의 스트레스 지수>를 체크하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 되었다. 나는 꽤나 예민해 스트레스를 잘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이 스트레스 총량이 어떠한 임계점이 지나면 나를 힘들거나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혹독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상세불명의 어쩌고' 증상들을 극복하기 위해 종합비타민이나 마그네슘 등 각종 고용량 영양제를 배부를 정도로 챙겨 먹는걸 거의 종교의식처럼 빼먹지 않았다. 주말 중 하루를 쥐어짜 내 밖에 나가 놀고 들어오면 잔여 주말 하루는 집 앞 동네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왔다. 매주 수액으로 에너지원을 공급 해대도 땅 밑에서 나를 잡아끌어내리는듯한 신체의 무거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출근해서 내 몫의 일을 해내려면 뭐라도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몸에 꽤나 많은 이상한 증상들이 생겼던 것 같다. 중요한 촬영장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콘티를 넘기는 손이 내내 덜덜 떨렸던 것도, 긴장해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긴장감 때문에 손을 떤 적은 거의 없었다. 퇴근시간 나를 스쳤던 밍밍한 초가을 바람에 오싹해지며 울고 싶을 정도로 추웠던 것도 이상했다. 늦어도 오후 11시에는 일부러 잠자리에 들고 매일 8시간 이상을 챙겨 잤지만 일어나는 순간부터 피곤해져 점심시간만 되면 엎드려 자는 루틴이 반복됐다. 그렇게 피곤한데 야근을 하고 필라테스 마지막 타임에 가면 안 죽고 열심히 하고 나오는 것도 좀 어이없었다.
나이도 어린데 이 정도로 힘든 건 내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백 프로다..라는 판단하에 내과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모든 수치가 너무 건강해서 문제가 없다며 당혹스러워했고, 결국 진단서를 받아 대학병원으로 갔더니 더 검사할 필요도 없이 가정의학과에 이런 증상을 잘 보는 분이 계시다며 과를 넘겨주셨다. 그 시기에 내가 느끼던 두루뭉술한 증상들을 나보다 더 명확하게 묘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그 가정의학과 진찰실에서 처음 만났다. 모발 검사, 혈액검사와 스트레스 검사를 했고, 자율신경계의 조절 기능이 망가졌으며 세로토닌 수치가 낮아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교수님을 주기적으로 만나 적절한 약을 먹으면서도 예전 컨디션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다가 결국 퇴사함으로써 번아웃은 종결되었는데, 사실 회사를 그만두고도 몇 개월 동안은 회복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암튼 이 번아웃 히스토리는 관련한 사건들이 너무 방대하고 긴 이야기라, 나중에 기회가 되면 조금 더 이야기해보기로 하고 그땐 그랬었다 정도로 마무리한다.
그때 이후로 나의 스트레스에 대한 대처는 1-2-3 단계로 발전했는데, 1단계에 내가 썼던 방법은 일단 스트레스 요소들을 말 그대로 피하는 방향이었다. 4년 반 동안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이후 얼마간의 시간 동안은 가능한 모든 스트레스 거리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집중했다. 일을 그만두면서 각종 책임감을 내려놓은 게 시작이었고,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양해를 구하고 내가 편하게 느끼는 방법으로 행동하거나 관계를 종료했고,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으며 지냈다. 늘 스스로 내 몸이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인지,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지 주치의 한 명 가까이 둔 것처럼 셀프로 상태를 체크했다. 스트레스로부터 열심히 도망 다녔지만 살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는 상황이 생길 순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니까 스트레스받는 상태에서 어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도 약 6개월 동안의 휴식기 겸 스트레스 회피기를 보내고 나니 신체적인 증상들이 거의 사라졌고 치료를 위해 먹던 약들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와 다행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날도 있었다. 별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내는데 언뜻 울적하다던가, 불쾌하다던가 하는 감정들이 순간씩 스치듯 느껴졌다. 싱싱한 냄새 사이에서 무언가 미세하게 오염된 냄새가 같이 코로 섞여 들어와 방금 뭐지? 하고 원인을 찾아내고 싶어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외부에서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들은 최소한으로 제한된 상태였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생각하다가 그때부터 내부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내 내면에서 도는 스트레스라, 나는 이것을 정적 스트레스라고 부른다. 외부 자극 없이 혼자 생각하는 데에만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기간이 길어질 때에 또 다른 결의 스트레스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자의식 과잉이 되거나, 에너지가 남으니 가볍게 넘길 작은 일들까지도 너무 파고들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맙소사. 그렇게 열심히 스트레스로부터 멀어지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이것을 인지한 때부터 스트레스 탐구 지수가 2단계로 업그레이드되었다.
1단계가 단순하게 외부 스트레스를 피하는 거라면, 2단계는 가능한 정적 스트레스와 동적(외부) 스트레스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일을 처리하며 활력 모터를 돌리고, 퇴근 이후 시간부터는 일을 잠시 잊고 오롯이 나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혹은 정신을 아예 로그아웃한 채 멍 때리기도 했다. 예전에는 퇴근하고도 내일의 일 생각을 놓지 못했는데 큰 변화였다.
나름 이런 저런 변화가 있었지만, 스트레스를 원하는 대로 컨트롤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긴 했다. 여전히 스트레스를 감지할 때면 불안했고, 일이 너무 많은 날이 지속되면 나 자신에게 자유시간을 확보해주지 못한다는 게 화가 났다. 밸런스라는 것도 애매했다. 그 밸런스가 무너지는 경계는 겨우 티스푼 하나 차이인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생기 있고 활력 있을 수 있는 중심축의 위치는 늘 바뀌는 것 같았고, 특히 일로 받는 스트레스에 한번 압도되어 깔려버리면 다시 빠져나오는 게 힘들었다. 그 무렵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2단계 모드로 업그레이드되며 예전보다 나아진 것은 1단계 때처럼 치료가 필요해지기 전에 무언가 상황을 바꾸었다는 점이었다. 너그럽지 못하고 날 서게 변해가는 내 성격과 약간의 카페인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 상태를 보니 지금 그만두어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뭐, 그때 다니던 회사에서 흥미를 잃은 영향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후로 다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면서 이런 스트레스 관리도 재정비 혹은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이제부터는 3단계를 완성시켜보려고 한다.
외부와 내부의 스트레스 밸런스 유지가 중요하다는 2단계의 생각은 쭉 변함이 없지만, 더 나아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진짜 꼭 필요한 만큼의 스트레스만 받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 총량이 적으면 갑자기 한쪽으로 쿵 떨어져도 타격감이 적을 것 같았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쾌락에 중독되어 쾌락만을 쫓습니다. 고난과 고통을 나쁜 것으로 분류하여 기를 쓰고 피해 다닙니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쾌락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삶을 반만 살겠다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 내용이 내겐 약간의 충격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읽은 후로부터 고통과 불행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스트레스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친구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좀 더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다른 3단계 발전은, 이것도 스트레스 총량을 줄이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확실한 방법들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힘들게 이루어 낸 일이 나에게 큰 성취감을 주면 어느 정도 힘들었던 것들이 상쇄되는 것처럼, 무언가 스트레스에 물타기 할 수 있는 것들을 자꾸 찾아보는 것이다. 아주 손쉽게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아끼는 바디로션을 바르며 기분의 환기를 시킨다거나, 내 힘으로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일에 맞닥뜨렸다면 그냥 힘들어하며 미리 마음의 평화를 위해 책정해둔 비용을 쓰면서 잠시 도망친다거나. (사람들은 시발 비용이라고 부르는..) 이건 행복해지는 행동은 아니지만, 복잡한 일들로 정신없을 때는 상황을 단순하고 딱딱한 텍스트 형태로 객관화시켜서 최대한 감정 소모 없이 빠르게 해결하는 것도 빠르게 평화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나를 즐겁게 하는 이런 행동들은 어느 정도 반복하면 효과가 소진되는 경향이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고갈되지 않을 행복우물 하나를 발견하는 게 지금 나의 3단계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을 열심히 찾고 있는데, 머지않아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웬만큼 엄청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나에게 다시 2017년 즈음의 번아웃이 올 만큼의 스트레스 총량을 넘어서는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하다. 유독 회사에 일이 많아 매일같이 야근하고 때때로 주말에 나가도 업무가 쌓였던 때인데, 아빠가 아팠던 것까지 겹치는 바람에 멘탈이 풍비박산 났던 때다. 그 시기가 아마도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한방에 받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힘들 수밖에 없을 상황에 놓여 있었구나 싶다. 그래도, 그 경험으로부터 어느 정도 내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과 케어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조금은 더 편안한 상태로 살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스트레스 측면에서도 사람들은 각자 다르다. 어떤 이는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지만 잘 이겨낼 능력을 가졌고, 또 누구는 같은 상황에 처해도 나만큼 힘들지 않을 수도 있다. 완전 개복치 유형도 있을거고. 각자가 각자에 맞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건 어떤 스트레스 처리 방법에 대해 알려주기보다는 내가 나의 경험과 느꼈던 것들을 공유하는 기록이다.
아무튼 내가 알게 된 결론은, 힘든 것은 다 지나가지만 힘들 때 못 버티면 망가진 몸과 마음이 남는다는 것. 버틸 수 있는 단단함을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