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의 사람적 거리두기 시기를 보내고 난 후 또다시 타인과 복작복작하게 함께하는 기간이 도래했다. 그동안 충전했던 에너지가 올라와서 남의 말을 들을 여유가 생긴 건지,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 어떤 주제로 말을 하며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시기인지 모르겠다.
30살이 되고 사회생활을 잠시 쉬어가고 있지만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은 꾸준히 있다. 한눈에 결이 맞음을 감지하고 한바탕 팽팽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마음이 쓰여 천천히 가까워지기도 했다. 반대로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에게 부재를 느끼게 해 스스로 실망스러웠던 순간도 있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주고받은 대화들을 나는 사실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대화하는 도중이나,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오늘 대화 참 만족스러웠다-' 생각하며 복기를 시도해 보지만 아침에 꿨던 꿈처럼 빠르게 뿌예진다. 듣는 도중 격하게 고개가 끄덕여지며 내 것으로 삼고 싶었던 상대방의 명언과 지혜가 기억나지 않는 귀갓길이 반복되다 보니, 대화 중 일시정지를 눌러놓고 메모하거나 녹화해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다.
아무튼 그런 망각의 향연 가운데서도, 비록 활자들은 증발해버렸을지언정, 그 순간 나눴던 대화의 오감은 다양한 형태로 남아 증거가 된다. 흥미로운 이야기일수록 입술이 뾰족해지는 상대의 입모양, 물이 흥건하게 맺혀 밍밍해진 커피잔, 초여름의 변화무쌍한 저녁 공기와 저무는 햇빛, 힘차게 걷느라 바람에 흔들리는 속눈썹 뿌리 감각. 노을빛이 통과하는 갈색 동공으로 나를 응시하는 눈매!
그날의 문자가 다 죽어서 깡그리 사라진 들 그 대화는 조금 더 직관적인 형태로 나에게 아로새겨진다.
근아 언니의 말을 빌자면, 우리가 말을 하기 위해 말을 하는 애들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소리뿐인 대화만 주고받았다면 그건 단지 소음이지, 기억상실증급 망각력을 가진 내게 남아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요즘은 남는 대화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와 함께 목소리로 사색하는 것 참 근사한 일이구나- 라는 기억을 30살 여름의 인상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