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사과하는 사람

by 지안

< 매일 oo 하는 사람 >의 시작이 되어준 글이에요.

이전에도 올렸지만, 시리즈에 잘 어울리는 곳에 옮겨다 발행해 봅니다.

연재를 한 주 건너뛰려는 속셈 아니냐는 의혹... 그것도 맞고요.

새해에 액땜하려고 했는지 몸살이 심하게 며칠 간 왔어요. 다시 몸 추슬러서 찬찬히 글을 모아보겠습니다.

전에 봤던 글이라도 편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왜 먼저 내려가서, 전화도 안 받고 사람 왔다 갔다 하게 만들어?”

화를 내는 사람 앞에서는 일단 얼음이 된다. 목소리는 굳고, 머릿속은 순식간에 백지가 된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미안해.”


수영장에서 아이들과 놀고 난 뒤였다. 남편은 차에 짐을 두러 주차장으로 갔고,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걸 옆에서 봤으니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5분 거리 음식점으로 향하며 머릿속은 이미 ‘무엇을 주문할까’로 가득 찼다. 아이 둘을 챙기느라 전화기의 진동 울림은 당연히 느끼지 못했다.


그 사이 남편은 사라진 아내와 아이들을 찾아 주차장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음식점에 도착했을 땐, 나는 태연하게 앉아 물을 따르고 있었고, 남편 눈에는 대낮에 똥개 훈련을 시킨 듯 황당한 풍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억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거 본 줄 알았어.’ 변명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한 박자 쉬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온 건 결국 “미안해.”였다. 나도 모르게 작동하는, 입 안의 자동 반사 신경처럼.


바쁜 아침, 집을 지저분하게 두고 나간 날, 애를 봐주러 온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걸레를 들었다. 바닥을 쓸고, 싱크대를 치우고, 냉장고 속까지 정리한 뒤 결국은 화를 냈다.

“내가 파출부야? 너는 나보고 다 치우라는 거야?”


나는 또 얼어붙었다. 애써 주고 간 손길이 고마우면서도, 화살을 맞은 듯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날 하루도 겨우겨우 버틴 내 사정은 뒷전이 된 것 같았다. ‘고마워’와 ‘미안해’가 뒤엉켜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건 역시나 “미안해요.”였다.


ai-generated-8759014_1280.jpg 출처 : Pixabay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과의 절반쯤은 내 덜렁대는 성격에서 비롯됐다. 아이 유치원 가방을 빼먹고 내 가방만 들고 나왔던 날, 매일 아침마다 찾아 헤매는 핸드폰, 아이 방과 후 수업 준비물을 빼먹어서 결국 집으로 바로 귀가한 일. 열거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죄송해요, 제가 까먹어서요.”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억울한 사과도 많지만, 솔직히 말하면 사과할 만한 순간도 꽤 많은 셈이다.


나는 매일 사과한다. 크고 작은 일상에서, 내가 잘못한 건지조차 모호한 순간에도. 사과가 습관이 된 건 어쩌면 지질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 덕분에 수많은 날이 무사히 지나갔다. 화를 더 키우지 않고, 갈등을 오래 끌지 않고, 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빠른 해결책이 “미안해”라면, 그것도 나름의 생존 방식 아닐까.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아마 평생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쯤 되면 ‘평생 무제한 사과 쿠폰’이나 ‘사과 구독제’를 만들어야 될 것 같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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